"나는 왜 내가 싫을까?"

우리시대의 대표적 질병, '자기부정'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하라!’ 이제는 교리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외쳐대었기 때문이다. 이 교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되짚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왜 우리 시대의 교리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의아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아낀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들은 언제나 소중히 대하며 아낄 수밖에 없으니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유행처럼 교리화된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시대의 많은 이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식스팩을 만들고,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명품을 두르는 이유가 뭘까? 다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황당한 거짓말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식스팩·화장·성형수술·명품’은 애절한 몸부림이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고 싶은, 그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메우려는 애절한 몸부림.


make-up-544538_1920.jpg
‘자기부정’, 우리시대의 대표적 질병


정직하게 말하자. 우리는 자신을 싫어한다. ‘자기부정’은 우리시대의 대표적 정서적 질병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는 드물다. 외모, 직장, 수입, 성격 등등 현재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자기부정에 시달리는 이들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왜 싫을까?” 자신이 왜 싫은지에 대한 제대로 답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될 테다.


달리 말해, 자기부정이 최초로 탄생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지점을 포착할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삶을 되찾게 될 테다. 자기긍정의 삶은 애초에 자연스러운 욕망이니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충분한 ‘자기긍정’에 도달하면 ‘자기부정’의 삶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 행복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내가 왜 싫을까?”


boy-2551423_1920.jpg


자기부정의 기원은 ‘완전성’


자신이 싫은 이유가 뭘까? 얼굴이 못생겨서,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성격이 이상해서, 직장이 변변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지적이지 못해서 등등.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다. 자기부정의 본질적인 이유는 ‘완전성’이라는 개념에 있다. 구체적으로 언어화, 규격화시켜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속에 ‘완전성’에 대한 개념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자신이 싫은 본질적인 이유다.


얼굴이 못생겨서 자기부정에 시달리는 이를 생각해보자. 그의 머릿속에는 ‘완전’히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그 ‘완전성’에서 무엇인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싫은 것이다. 코 높이, 쌍꺼풀, 속눈썹 길이 등 머릿속에 개념화해놓은 아름다운 얼굴의 ‘완전성’이 있다. 그 ‘완전성’에서 자신의 코 높이, 쌍꺼풀, 속눈썹 길이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못생겼다고 판단 내리게 된다. 자기부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다른 자기부정의 사례들도 다 마찬가지다.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성격이 이상해서, 직장이 변변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지적이지 못해서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도 정확히 그렇다. 다들 자신만의 ‘완전성’이 있고, 그 ‘완전성’에서 자신이 무엇인가가 어느 정도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기에 자기부정이 생긴다. 개인마다 자기부정의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완전성’에서 자신이 덜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덜한 자기부정을, 더 결핍되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더한 자기부정에 시달리게 된다.


kid-2529909_1920.jpg


스피노자의 ‘완전성’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완전성’이다. 자기부정은 ‘완전성’이라는 개념과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 ‘완전성’을 어떻게 정의했을까?


“사물의 완전성은 전적으로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하고, 따라서 사물은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거나 거슬린다는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티카, 제 1부, 부록)


스피노자는 어떤 사물이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혹은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해가 어렵다면 ‘어떤 사물’을 ‘얼굴’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떤 얼굴이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조각처럼 생긴 연예인들의 얼굴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 동시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분명 우리의 감각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들의 얼굴이 더 완전한 것이 아니며, 화상을 입은 사람의 얼굴이 덜 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냥 각자의 생김새가 있을 뿐, 거기에는 더 완전한 얼굴도, 덜 완전한 얼굴도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완전성’의 개념들도 돌아보자.


미생물, 물고기, 원숭이 중 우리는 어느 동물이 더 완전하다고 여길까? 아마 많은 이들이 원숭이라고 여길테다. 왜 그런가? 그건 단지 원숭이가 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고기 아니, 미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덜 완전한 게 아니다. 그냥 각자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는 더 완전한 생물도, 덜 완전한 생물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갖고 있는 ‘완전성’이라는 개념은 이토록 황당할 정도로 자의적이다. 우리의 자기부정은 이 황당한 ‘완전성’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있다.


jenga-2583734_1920.jpg


실재성=완전성


그렇다면, ‘완전성’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인걸까? 그래서 완전성은 어떤 식으로든 평가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스피노자는 “사물의 완전성은 전적으로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어떤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따라서 완전성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성과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난해한 이야기에 앞서, 스피노자가 ‘완전성’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제 2부, 정의 6)


스피노자는 실재성과 완전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실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연예인의 얼굴도 ‘실재’하고, 화상 입은 얼굴도 ‘실재’한다. 그러므로 둘 다 ‘완전’하다. 미생물, 물고기,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다 세상에 ‘실재’하는 것들이다. 즉, 이 모든 사물들은 인간을 즐겁게 하든 불편하게 하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 즉 이 인간 또는 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모두 자연의 질서에서 생길 수 있다.”(에티카, 제 2부, 공리 1)


‘존재’(있음)에는 두 가지 존재가 있다. 실재적 존재와 잠정적 존재. 꽃을 예로 들어보자. 활짝 핀 꽃은 실재하는 꽃이다. 즉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꽃. 하지만 그 실재적 존재로서의 꽃만 꽃인 것은 아니다. 씨앗 역시 꽃이다. 다만 잠정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씨앗은 곧 꽃이 된다. 그래서 씨앗은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꽃이다. 이제,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라는 스피노자의 난해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feverfew-3566879_1920.jpg


완전한 인간에 대하여


두 가지 인간 존재가 있다. 실재적 존재로서 인간, 잠정적 존재로서 인간. 이미 태어난 인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인간도 잠정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모두 자연의 질서에서 생길 수” 있으니까.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그 자연의 질서 안에서 누군가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테고, 그 인연은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킨다.


인간의 본질은 실재적 존재와 잠정적 존재, 두 존재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니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안에서 인간은 실재적일 수도 있고, 잠정적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스피노자가 인간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 이유다.


“인간은 신의 본성을 어떤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1, 주석)


스피노자에게 가장 완전한 존재는 자연(신)이다. 그런데 바로 인간이 그 자연의 본성을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변용(변화)이자 양태(변화된 것)다. 말하자면, 인간은 작은 자연(신)인 셈이다. 그래서 실재하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이제 완전한 존재와 덜 완전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세상에는 덜 (혹은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 ‘실재’적인 것은 ‘완전’하고 ‘잠정’적 것은 덜(혹은 불)완전하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실재적 존재로서 인간은 완전하고, 잠정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덜 완전하다. 왜냐하면, 태어난 인간(실재적 존재)과 태어날 인간(잠정적 존재)의 '본성과 능력'은 확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스피노자가 “사물(인간)의 완전성은 전적으로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잠정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기에 덜 완전하다.


drop-of-water-1836061_1920.jpg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법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겠다. 그건 우리의 자의적인 ‘완전성’ 개념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불쾌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 덜 완전한 것도 아니다. 키 큰 사람, 잘생긴 사람, 돈 많은 사람이 완전한 것도 아니고, 키 작고, 못생기고, 돈 없는 사람이 덜 (혹은 불)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미 실재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자의적인 그래서 허구적인 ‘완전성’을 간파할 수 있다면 자기부정은 애초에 없다. 자기부정은 언제나 자의적으로 설정해놓은 오해된 ‘완전성’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이것은 내가 자기부정에서 벗어난 방법이기도 했다. 한 동안 극심한 자기부정에서 시달렸다. 돈벌이도 시원찮고, 철학이나 공부하고, 골방에 앉아 글이나 쓰는 나 자신이 싫어진 적이 있다. 그런 삶은 내가 간절히 원했던 삶이었는데도 말이다. 극심한 자기부정은 우울증이 되었다.


그렇게 자기부정과 우울증을 애써 누르며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이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며, 삐뚤빼뚤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나도 아빠처럼,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나의 자기부정은 내 마음속에 있는 어른의 ‘완전성’ 때문이었음을.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야를 공부하고,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인정을 모두 성취한 전문가. 그것이 내 마음속 어른의 ‘완전성’이었다.


내 삶이, 자의적으로 구성해놓은 그 ‘완전성’에서 결핍되었기 때문에, 결핍된 만큼 자기부정에 시달렸던 게다. 아들의 한 마디로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어른의 ‘완전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어른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아버지 즉, 어른으로 ‘실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후, 더 이상 돈벌이가 시원찮고, 철학을 공부하고, 글 쓰는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KakaoTalk_20181230_145722121.jpg


자신을 긍정하는 법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기긍정으로 가는 첫 단추일 뿐이다. 자기부정에서 벗어난다고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 역시 그랬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철학을 공부하는, 글을 쓰는 ‘나’가 싫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나’를 오롯이 긍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실재성과 잠정성의 논의로 돌아가야 한다. 실재적 존재인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하다. 하지만 실재성, 즉 완전성이 고정불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완전하다. 하지만 자연은 고정불변이지 않다. 늘 변한다. 눈이 오는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실재적 존재인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다. 하지만 고정불변하지 않다. 지금껏 변해왔듯이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다. 인간은 작은 자연이니까. 그래서 실재성 안에는 잠재성이 내포되어 있다.


나의 현재 실재성은 철학을 공부하며 글 쓰는 사람이다. 이런 실재성은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던,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 지나고 돌아보니, 나는 ‘철학하는 글쟁이’가 될 잠재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늘 삶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고,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어 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진정으로 ‘나’를 긍정할 수 있었다.


직장이 변변치 않다고,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해서 자신을 부정할 필요 없다. 우리는 실재하기에 모두 완전하니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실재성 속에 있는 잠재성에 눈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잠재성을 쉬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덜(혹은 불)완전하기에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겨울에 이미 봄이 잠재해 있지만 우리는 눈을 볼뿐, 꽃은 볼 수 없는 않는 것처럼.


하지만 잠재성은 덜(혹은 불)완전하기에 지금과 다른 무엇인가가 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 반짝이는 그 잠재성을 발견하면 ‘나’를 오롯이 긍정할 수 있다. 자신의 잠재성을 발견하면 어느 순간,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직업적 전환을 한 이들은 눈을 돌려 자신의 잠재성을 발견한 이들이다.


직장과 외모는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외모와 달리, 외모는 선천적인 것이고 직장은 바꿀 수 있으니까. 물론 잠재성을 발견한다고 키가 커지고 외모가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잠재성의 발견은 예상치 못했던 다른 방식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준다. 키가 작고 못생겼지만 매력적인 사람들은 눈을 돌려 자신의 잠재성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진정으로 자신을 긍정하게 될 수 있다.


실재성(완전성)으로 자기부정에서 벗어나고, 잠재성으로 자기긍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부정을 넘어 진정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keyword
이전 04화"유리멘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