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기억'
스피노자의 ‘기억’
"어떻게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먼저 스피노자는 ‘기억’이란 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인간의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되는 각각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물체의 본성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6)
기억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그것을 “인간의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되는(발생하는) 각각 관념”이라고 말한다. 적확한 정의다. 외부물체 없이 발생하는 관념(생각)은 기억이 아니라 공상 혹은 상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은 반드시 외부물체들로부터 자극받아 발생한다. 돈의 쪼들림에 관한 나의 관념은 기억이다. 그것은 “외부 물체(어머니, 아버지, 돈)로부터 자극받아”서 “인간(나)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물체의 본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이해하게 된다. (중략) 그것은 인간의 신체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의 본성을 포함하는 관념들의 어떤 연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은 인간 신체의 변용들의 질서 및 연결에 따라서 정신 안에 생긴다. (중략) 그것은 사실 인간 신체의 변용의 관념이며, 이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외부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8,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억에는 두 가지 대상이 관여하고 있다. 자신의 신체와 외부물체. 이제 왜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다. 외부 물체가 있었다고 해도, 그 외부물체가 우리의 신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자극적이지 않았다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돈의 쪼들림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침조회 때 콩닥거렸던 심장, 서러워서 흘린 눈물 때문이다. 이처럼 신체의 변화들이 있을 정도로 외부물체의 자극이 강렬했기에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기억, 동네 오빠에게 성추행 당했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때의 두려움과 수치심, 증오와 복수심에 온 신체가 부들부들 떨렸을 테다. 외부물체(아버지, 동네오빠)들이 신체에 각인될 정도로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인 문제인 동시에 신체적인 문제다. 그래서 기억은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물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쁜 기억이 우리의 마음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피해의식’의 작동원리
“인간의 신체를 한 때 자극하여 변화시켰던 외부 물체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더라도, 정신은 그것들을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7, 계)
이제 ‘정신-신체’적인 나쁜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으로 기능하지도 알겠다. 기억, 즉 우리의 “신체를 한 때 자극하여 변화시켰던” 나쁜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 나쁜 기억을 신체에 각인했던 ‘외부 물체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신은 그것을 마치 현존(지금 있는)하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
돈이 많아도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돈에 쪼들렸던 나쁜 기억 때문이다. 그 나쁜 기억 때문에 현재 ‘돈 없음’이 존재하지 않아도, 정신은 그것을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가 죽으면 그 나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지금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아도, 정신은 뺨을 후려갈기던 아버지가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결국 다 돈이면 다 되는 거 아니야!” “결혼은 아이 인생망치는 일이야!” “남자들은 다 짐승이야!” 이런 의식들은 모두 피해의식이다. 이런 피해의식이 생기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돈 없음’ ‘아버지’ ‘동네오빠’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나쁜 기억은 그것들이 현존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그렇게 돈 없던, 폭행을 당했던, 성추행을 당했던 시절에 영원히 매여서 살게 되기에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는 법
그렇다면 나쁜 기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스피노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외부 물체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외부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 신체의 상태를 보다 많이 나타낸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6, 계 2)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와 외부물체 두 요소가 결합되어야 ‘기억’된다. 하지만 그 두 요소가 기억에서 동등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외부물체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지만, “외부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의 신체를 보다 더 많이 나타낸다.” 아버지의 폭행에 대한 기억을 예로 들어보자. 그 기억은 아버지(외부물체)의 본성보다, 그 당시 그의 신체 상태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이 지워지지 않는 나쁜 기억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아버지의 폭행과 폭행을 당한 신체. 스피노자는 아버지의 폭행 그 자체보다 폭행을 당한 신체의 상태가 나쁜 기억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셈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그때 그의 신체가 연약했기에 그 나쁜 기억이 마음에 더욱 크게 자리 잡은 것이다. 만약, 그가 성인되어서 강건한 신체를 가진 이후에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했다면 어떨까? 분명 그 기억은 지금의 기억과는 다를 것이다.
오해는 말자. 폭력적인 외부물체(돈, 아버지, 동네오빠)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하자. 나쁜 기억은 우리의 신체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나쁜 기억을 주었던 외부물체들에게만 집착할 때, 우리는 결코 그 나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쁜 기억은 그때 자신의 신체 상태에 크게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는 시작점이다.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좋다. 나쁜 기억이 외부물체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상태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그 나쁜 기억, 더 나아가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알아보자.
“만일 인간의 신체가 어떤 외부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된다면, 인간의 정신은 신체가 그 외부 물체의 존재 또는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으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될 때까지는, 그 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혹은 자기에게 있어 현재적인 것으로 고찰할 것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17)
지금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은 신체가 그 외부 물체의 존재 또는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으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될 때까지는” 그 외부물체를 자기에게 있어 현재적인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그 ‘외부 물체(돈, 폭행, 성추행)의 존재를 배제하는 변용’이 가능하다면, 그 외부물체를 더 이상 자신에게 있어 현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외부 물체의 존재를 배제하는 변용(변화)’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돈 없음·폭행·성추행’(외부물체)의 존재를 없애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달리 말해, 나쁜 기억에 얽매인 자신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피해의식까지 불러올 나쁜 기억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기억(관념)은 결국 신체에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돈 없음·폭행·성추행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23)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신체에게 신체에 각인되는 새로운 기억. 스피노자는 신체의 변용(변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신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다른 기억을 통해서만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의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럴 수 있을 때, 세상에 존재하는 외부물체들을 피해의식 없이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자기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통해서만 외부의 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지각한다.” (에티카, 제 2부 정리 26)
나쁜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이제 돈 없음에 매여 살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적게 쓰고, 더 없으면 돈을 번다.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없다. 그건 과거 돈에 쪼들렸던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다 기억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억을 쌓았다. 신체가 변화될 정도의 기억들. 돈이 없지만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돈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고된 삶을 견디는 이들. 그들을 보며 나는 다시 심장이 콩닥거렸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신체가 변화되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났고, 동시에 피해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그 역시 그렇게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으로 결별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왜 그렇게 심하게 자신을 때렸었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답장을 했다.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못나서 그랬다’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편지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단다. 지금 그는, “아직 결혼할 자신은 없지만 결혼이 꼭 아이를 망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기억과 피해의식을 떠나보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오래된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과 결별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스런 연인의 입맞춤과 손길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떨림을 경험했다. 그 신체적 떨림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기쁨의 설렘이었다. 연인과 첫 잠자리에서 펑펑 울었단다. 지금 그녀는 “여전히 남자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모든 남자가 짐승인 것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기억과 피해의식을 떠나보냈다.
나도, 그도, 그녀도 이제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돈에 찌들린 삶, 폭행당한 삶, 성추행을 당한 삶을 나름의 방법으로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돈, 가정, 남자에 대해 누구와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그것들에 대한 지독한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분명 더 행복해졌다.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났기에,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