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꿈꾸고 있습니다. 클라스트르가 말했듯 ‘국가’는 ‘하나’이고, ‘하나’는 ‘악’입니다. 개별적 단독자들을 ‘하나’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악’입니다. ‘국가’는 ‘하나’라는 ‘악’의 원형적 모델입니다. 그래서 클라스르트는 국가를 그리도 문제 삼았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개별적 단독자들이 파편화된 원자 상태로 머물려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클라스트르가 인디언들에게 매혹되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겁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어떻게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클라스트르는 그 답을 오래된 미래인, ‘인디언 공동체’가 껴안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한 줄로 요약하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절묘한 균형감각’에 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공동체 없는 개인’ 혹은 ‘개인 없는 공동체’에 매몰되어 버리니까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꼼꼼하게 읽어가며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왜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공동체 없는 개인’, ‘개인 없는 공동체’ 너머의 공동체,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수업하며, 그 공동체를 가능케 할 사회-기술적인 실마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수업을 끝내며 제가 내린 결론은 ‘지금은 공동체를 구성하지 말아야겠다.’입니다. 그 사회-기술적 실마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실마리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찾았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향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이 국가를 추동한다.’는 클라스트르의 통찰에 저는 멈춰 섰습니다. ‘폭력을 향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멈춰 세우지 않고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폭력을 향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은 탐욕이든, 자기연민이든, 자기 것을 악착같이 지키려는 욕망에 기초해 있지요. 그렇다면, 폭력을 향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은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을까요? 두 말할 나위 없이 사랑입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는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악착같이 내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 것을 내어주는 그 사랑으로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가 가능할 겁니다. 이 근원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 너무 성급하게 사회-기술적인 논의로 들어가서는 안 될 겁니다. 그 성급한 사회-기술적 논의의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시대의 넘쳐나는 폭력적인 ‘작은 국가’로서의 공동체가 난무하는 이유일 겁니다.
이것이 제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덮으며, 공동체를 바라는 제 마음도 잠시 덮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기꺼이 제 것을 내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것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저는, 공동체를 구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덕분에 너무 늦지 않게 부끄럽지만 소중한 성찰에 이르렀습니다. 공동체애 대한 욕망 자체가 작은 탐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꿈꾸고 있습니다. 그 꿈을 위해, 폭력을 향한 저의 은밀한 욕망을 멈춰 세울 겁니다. 기꺼이 제 것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늘려 가보려 합니다. 지쳐버리지 않게 천천히, 조금씩 그렇게 더 사랑하려 합니다. 어쩌면, 인간다운 공동체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덮어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