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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는 없다.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

나는 무신론자다. 신을 믿지 않는다. 철학적 신념이다. 철학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를 신으로 추앙할 수는 없다. 근대 철학을 열어젖힌 데카르트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양 철학은 ‘신 없는 인간’에 대한 긍정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되려 이리 생각한다. 무신론자는 없다.


 어떤 절대자를 믿는 사람, 대표적으로 기독교인은 ‘신’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동시에 나는 ‘신’을 ‘믿지’ 않기에 무신론자다.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는 ‘신’을 기준으로 분류된다. 이 관점에서는 분명 무신론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신’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지점에서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을 ‘믿지’않지만 분명 내가 ‘믿는’ 것들이 있다. 내게도 신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나의 철힉이며,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 존재들을 믿는다. 어쩌면 내게는 ‘신’의 자리에 ‘철학’ 혹은 ‘사랑하는 이’가 들어차 있다. 기독교인들과 다른 '신'일 뿐, 나도 '신적인 것'들을 독실하게 믿고 있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언제가 기독교인들과 3:1로 조금은 과격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참고로 기독교인이 3이었다. 불공평했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은 하나님도 있으면서)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란 주제였다. 한 시간 여의 토론 끝에 낸 결론은 이것이었다. ‘신이 있다’는 것도 ‘신이 없다’는 것도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범신론을 주장했던 스피노자의 날카로운 논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을 없다’는 믿음을 가진 자가 결국 무신론자이고, ‘신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가 기독교인이다. 역설적으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둘은 같다. 다만 믿는 것이 다를 뿐. 이제 무신론자인 내게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행동하거나 변하지 못한다. 우리는 ‘믿는 것’으로 행동하거나 변화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이 좋다’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책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좋다’라는 것을 믿을 때만 책을 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믿으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간명하게 답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나는 내 삶을 유쾌하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어떤 것을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또한 내 삶을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어떤 것을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에서 중요한 건 믿음(어떤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으며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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