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of love’
어제는 둘째의 건강검진이 있었다. 유치원에 데리러 갔다. 요즘 듣는 곡이 있다. ‘Ashes of love’ 글쓰기 전에 듣고, 글 쓰다 지치면 듣고, 자기 전에 듣는다. 둘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듣고 싶었다.
“예빈아, 이거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한 번 들어볼래?”
“좋아.”
“그럼 다 듣고 어떤 느낌인지 말해줄래?”
“이야기해주면 솜사탕 사줄 거야?”
“그래. 좋아.”
차 안에 노래가 흘렀고 둘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그런데 왜 이건 말(가사)이 없어?” “어 이건 말이 없는 노래야. 아빤 말이 없는 노래 좋아해”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내고 음악을 들었다. 같은 곡이 두 세 번 들을 때 즈음 병원에 도착했다. 별 생각 없이 아이에게 물었다.
“예빈아, 어땠어?”
“어. 어. 뭔가 용주(둘째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랑 헤어지는 느낌이야. 헤어져서 조금 슬픈 느낌이야. 그런데 헤어져도 또 다음 날 만날 수 있으니까 기분이 좀 좋은 느낌도 들어”
조금 놀랐다. 아이는 다 알고 있구나. 이곡은 밝으면서도 어둡고, 기쁘면서 슬프다. 가득차면서 텅 비었다. ‘사랑의 잿더미’라는 곡 이름처럼. ‘Ashes of love’ 내겐 너무 소중한 곡이다. 이 곡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곡의 느낌을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했다. ‘사랑이 남긴 잿더미’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이는 언어의 세계로부터 아직 안전하기에 감정을 감정 그자체로 느껴버리는 것일 테다. 어른들이 감정을 감정 그 자체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언어 세계로부터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테다. 삶의 진실인 그 모호함을. 오직 진실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만이 그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나는, 사랑의 잿더미가 밝으면서도 어둡고, 기쁘면서 슬프고, 가득차면서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안다. 아이들도 그것을 안다. 아이들과 그 사랑의 잿더미를 더 쌓아가고 싶다. 아이들이 음악을 듣고, 시를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사랑하는 사람이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의 잿더미를 쌓아가고 싶다. 언젠가, 언젠가 우리의 마지막 날, 그득히 쌓인 잿더미에 아름다운 우리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