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복싱의 오르가즘

리듬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

절정의 긴장감이 주는 오르가즘

     

나는 복싱이 좋다. 단순히 상쾌하게 땀을 흘릴 수 있어서가 아니다. 두세 뼘의 거리 안에서 둘이 있는 힘껏 치고받는 절정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희열이 있다. 거의 오르가즘에 버금간다. 둘이서 그렇게 치고받는 상황일 때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동물처럼 순간적인 반응으로 치고받을 뿐이다. 그 느낌이 좋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동물적인 반응만 하게 되는 그 순간의 느낌. 그건 문명화된 인간 사회에서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희열이다. 눈에 멍이 들고, 턱이 아프고, 가끔 어지러워도 그 희열을 멈출 수 없다. 그건 오르가즘이니까.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는 복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복싱에 중독 된 것 같기도 하다. 그 무아無我의 오르가즘이 주는 기쁨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체육관에서 그 희열을 맛볼 수 없다. 컨디션이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고막이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처럼 세게 치고받을 수가 없다. 그래도 매일 줄넘기와 쉐도우만하고 샌드백만 치고 싶지는 않다. 지겹다. 고막이 찢어졌어도 치고받고 싶다. 간절하면 방법을 찾게 된다. 요즘에는 가볍게 치고받는 스파링을 한다. 



 그런 가벼운 스파링은 일반 회원들과는 불가능하다. 얼핏 생각하기에 가벼운 스파링은 일반회원들이 더 적합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반회원들은 흥분하거나 긴장하거나 혹은 당황해서 한 번씩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상대를 때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고막이 찢어진 것도  일반 회원에게 맞아서였다. 가볍게 치고받는 스파링은 프로 선수들과 해야 한다. 치고받는 것이 일상인 프로선수들은 스파링에서 흥분, 긴장, 당황하지 않는다. 그래서 힘 조절을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벼운 스파링이 가능하다. 

     

 치고받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프로 선수들과 스파링을 했다. 가볍게 치고받는 스파링. 인생의 묘미 중 하나는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발견할 때다. 가벼운 스파링을 하며 그 인생의 묘미를 하나를 찾았다. 힘껏 치고받는 절정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오르가즘 말고 또 하나의 오르가즘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벼운 스파링은 긴장감이 없고 시시해서 그 어떤 몰입의 즐거움을 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벼운 스파링을 하며 복싱의 또 다른 오르가즘을 느꼈다. 


리듬을 타는 오르가즘

     

가벼운 스파링은 세게 치고받지 않기 때문에 몸에 힘들 덜 들어간다. 그래서 더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가볍게 움직이다보면 몸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몸의 리듬은 상대의 리듬과 조화를 만들어낸다. 정확히는 상대의 리듬에 내 리듬이 동기화된다. 그 순간이 되면, 상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수 있다. 그렇게 피하다보면, 내가 때릴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 나온다.

      

 그런 움직임이 반복될 때 나는 다시 생각이 없어지고 무아의 상태가 된다. 세게 치고받지 않지만, 내 몸이 리듬을 타고, 내 움직임의 리듬이 상대의 리듬을 빨아들일 때, 나는 없다. 그저 상대의 리듬에 동기화된 나의 리듬에 몸을 맡길 뿐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움직인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찾아온다. 그것이 복싱의 또 다른 오르가즘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희열인지 언어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울 뿐이다.

    


 복싱은 춤과 닮아 있다. 가볍게 치고받으며 리듬을 탈 때 느끼는 오르가즘은, 마치 춤을 추며 리듬을 타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왜 복싱 체육관에 항상 음악이 흘러나오는지도. 왜 일류 복서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듯한 연습을 하는지도. 리듬에 몸을 맡길 때 또 다시 무아의 오르가즘을 느낀다. 세게 치고받는 스파링이 주는 오르가즘은 동물적인 오르가즘이다. 리듬을 타는 가벼운 스파링이 주는 오르가즘은 아름다움의 오르가즘이다.   



   

 춤은 아름답다.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 때문이다. 리듬에 맞춰 춤추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선은 아름답다. 복싱 역시 그렇다. 어느 순간, 복서들의 움직임이 선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있는 복서들의 움직임은 선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선이 아름다운 복서들이 직접 보는 수밖에. ‘호르헤 리나레스’Jorge Linares나 ‘사울 알바레즈’Saul Alvarez라는 선수가 있다. 선이 아름다운 복서를 말하라면 이 두 복서를 꼽고 싶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복싱은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게 된다. 이들의 독특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복싱의 진정한 매력은 치고받음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독특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선이 복싱의 또 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리듬을 탈 때 느껴지는 무아의 오르가즘은,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선의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성적인 오르가즘 역시 결국 아름다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복싱은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나는 한 동안 복싱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 여겼다. 리듬이 주는 오르가즘을 느낀 후 생각이 바뀌었다. 복싱은 둘이서 하는 스포츠다. 복싱의 묘미가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는 것, 이것이 복싱의 또 다른 묘미다. 복싱이 춤이라면, 그 춤은 혼자 추는 춤이 아니다. 함께 추는 춤이다. 내 몸이 리듬을 타고, 상대의 리듬에 나의 리듬의 맞춰가는 춤.  

    

 이것이 가능해질 때 무아의 오르가즘이 찾아온다. 그것은 마치 둘이서 리듬을 타며 춤을 출 때 느껴지는 오르가즘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복싱은 혼자 할 수 없다. 그래서 복싱에서 리듬을 타려면 상대방과의 절묘한 조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일반 회원들과 리듬이 주는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 없는 이유다. 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박자를 놓치느라 리듬을 탈 수 없으니까 말이다. 

     


 복싱이 주는 리듬의 오르가즘을 느끼려면 복싱에 익숙하고 능숙한 사람과 스파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의 리듬을 맞춰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춤에 익숙하고 능숙한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리듬을 타며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이 빡센 스파링 대신 상대를 배려하며 가볍게 스파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 대 맞더라도, 일반 회원들이 복싱이라는 춤에 익숙하고 능숙해지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오르가즘을 위해서. 체육관에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더 자주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복싱은 결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니까.    

  

 복싱이 주는 두 가지 오르가즘은 결국 모두 무아의 상태에서 온다. 서로 죽일 듯이 치고받는 절정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무아의 상태. 그리고 가볍게 움직이며 리듬에 몸을 맡길 때 찾아오는 무아의 상태. 나는 리듬의 오르가즘에 더 매혹된다. 마흔을 넘긴, 내 육신이 치고받는 절정의 긴장감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리듬을 타며 복싱을 하고 싶다.

       

 리듬을 타며 흠뻑 땀을 흘리고 체육관을 나설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 전체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어떤 리듬일까? 그리고 그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은 어떤 모습일까? 시간이 지나, 나만의 리듬으로 시작된 점과 끝나는 점이 만들어낸 그 선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는 나만의 리듬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는, 복싱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아름다워지려는, 복서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