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다시 시합에 나가지 않는 이유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왜 다시 시합 안 나가세요?”

 

데뷔전이 끝났다. 꿈을 이뤘다.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끔 생각했었다. 꿈을 이루고 나면 복싱을 접어야겠다고. 애초에 복싱을 시작했던 목표가 복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프로복서가 되고 난 이후에도, 거의 매일 체육관에 나가서 운동했다. 재미와 사람 때문이었다. 이제껏 수행하듯 운동을 했다면, 이제 정말 복싱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재미를 느끼고 사람을 만나면서 운동을 계속 하고 있을 때였다.

      

 “형님, 왜 다시 시합 안 나가세요?” 체육관에 한국 챔피언이 있다. 그가 물었다. 뭐라 답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왜 그 질문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복서는 시합을 통해 성장한다. 이겼든 졌든 진검승부의 과정에서 복서로서 성장한다. 시합이 주는 긴장감이 훈련의 밀도와 집중력을 높인다. 또 진검승부를 펼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워나간다. 그래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5년을 운동하며 2전을 뛴 복서보다, 2년을 운동하며 5전을 소화한 복서가 실력이 더 좋다. 마치 시험이 있어야 공부가 잘 되고 아는 것이 쑥쑥 느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것을 느꼈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 복싱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던 상대의 움직임이 보이고, 안 되던 동작이 자연스레 몸에 익었다. ‘복싱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걸 새삼 느꼈다. 거의 매일 나와 몸을 섞는 한국 챔피언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아무 대답하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며 그는 다시 말했다. “형님, 다시 시합 나가면 이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아쉬운 것이다. 친한 형이 1패로 마감하는 복서로 남는 것도, 이제 1승을 할 실력이 되었는데 시합을 나가지 않는 것도.

      

 사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시합을 끝내고 난 이후에도 몇 년을 계속 복싱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제 시합을 나가면 이길 수 있다는 걸. 물론 진짜 시합에 나가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바람이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체육관에서 20대 프로 선수들과 몸을 섞어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시합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왜 시합을 다시 나가지 않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나이도 많고, 감량도 어렵고, 잔부상도 많아서요.’     



욕망이 흐른다는 것


거짓말은 아니다. 나이도 많고, 감량도 어렵고, 잔부상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 시합에 다시 나서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니다. 몇몇 사람들로부터 두 번째 시합을 권유받았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프로복서가 되고 싶었을까?’ 그건 욕망 때문이었다. 나의 욕망. 첫 시합은 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을 흐르게 한다는 의미다.

      

 첫 시합은, 긴 시간 내 안에 고여서 썩어가던 욕망을 흐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첫 시합이후 더 유쾌하고 씩씩해진 이유였다. 고여 있던 욕망이 흐르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다음 욕망이 흐르게 된다. 억압된 욕망을 흐르게 함으로써 다음 욕망을 드러나게 하는 것. 그렇게 내 안에 있는 욕망이 내 삶을 밀고 나가게 하는 것. 건강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래서 욕망을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욕망을 흐르게 함으로서 더 건강해졌다.

       

 다시 시합을 나가지 않는 이유 역시 욕망 때문이다. 프로복서가 되고 난 이후 흐르게 된 욕망은 두 번째 프로 시합이 아니었다. 내 안에 고여 있던 욕망이 흘러서 다시 만나게 된 욕망은 작가와 철학자로서의 욕망이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욕망,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철학자로서의 욕망. 그것이 고여 있던 욕망이 흘려서 다시 드러난 다음 욕망이다. 나는 이제 작가로서, 철학자로서의 욕망을 따라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두 번째 시합을 굳이 나가지 않는 진짜 이유다.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자. 다시 시합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복싱을 잘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승리의 포효를 외치고 싶었다. 다시 시합에 나가면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들수록 그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욕망 아닌가? 그렇다면 이 욕망 역시 실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다. 욕망에는 두 가지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첫 시합이 ‘자신의 욕망’이었다. 두 번째 시합은 ‘타인의 욕망’이다. ‘타인의 욕망’은 불특정다수에게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는 욕망이다. 그래서 그 욕망은 자극적이다.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면 자극적 만족이 있다. 인정받고 칭찬 받을 때 그 짜릿한 만족. 하지만 타인의 욕망 끝에는 공허와 허무가 도사리고 있다. 모든 자극적인 만족이 그런 것처럼.      


 이것이 내가 시합에 다시 나서지 않은 또 다른 이유다. 다시 시합에 나가면 이길 것 같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시합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다시 시합에 나가고 싶다는 욕망은 공허와 허무를 불러오는 '타인의 욕망'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 욕망은 20대 시절 외모를 꾸미고 싶다는 헛된 욕망, 30대 시절 돈을 벌고 싶다는 헛된 욕망의 반복임을 나는 알고 있다.


     

두 삶을 횡단하는 즐거움

    

첫 시합도 분명 욕망을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욕망’이 아니었다. 오롯이 나 ‘자신의 욕망’이었다. 긴 시간 내 안의 욕망을 흐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인정, 칭찬 같은 것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나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시합 후에 내가 더 유쾌해지고 강건해진 이유였다. ‘자신의 욕망’ 끝에는 언제나 유쾌함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은 기쁨이고 ‘타인의 욕망’을 이루는 일은 슬픔이다. 이 삶의 진실은 때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누가 슬프게 살고 싶고, 누군들 기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일 테다. 상처받기 쉬운 인간에게 두 가지 욕망은 언제나 중첩되어 있다.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뒤엉켜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오해하며 산다. 또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이라 오해는 일도 드물지 않다.

       

 작가와 복서를 횡단했던 지난 몇 년은,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돈 안 되는’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복싱은 분명 ‘자신의 욕망’이었지만, 어느 순간 ‘타인의 욕망’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자신의 욕망’이 언제 어떻게 ‘타인의 욕망’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 두 가지 욕망을 구분할 수 있다. 혼란스럽게 뒤엉킨 ‘타자의 욕망’과 ‘나의 욕망’의 경계선을 흐릿하게나마 그을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작가와 복서를 횡단했던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조금 더 능숙하게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쁨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어떤 욕망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구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작가와 복서라는 두 삶을 횡단하는 ‘돈 안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분명 긴 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을 향해 질주하느라 기쁨으로부터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찔한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싱의 오르가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