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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야만 하는 산

저주를 풀기 위한 이정표

    

꿈을 이룬 사람은 이정표가 된다. 저주처럼 들러붙은 꿈을 찾았지만, 그 꿈을 어떻게 이뤄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이정표.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내게 고백했다. 자신 역시 나와 비슷한 꿈이 있다고. 어린 시절, 부조리한 폭력에 굴복해서 생긴 그 열패감. 그 때문에 수시로 주눅 드는 마음과 결정적인 순간에 멈칫 거리게 되는 소심함. 그 모든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이들이 있다.   

  

 당당하고 싶었던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오락실에서 동네 양아치들에게 돈을 뺏겼다. 폭력에 굴복해서 생긴 그 열패감은 곧 마흔을 앞둔 그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 춤추고 싶었던 아이가 있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을 본 친구들이 소리 내어 비웃었다. 폭력에 굴복해서 생긴 그 열패감은 서른을 훌쩍 넘긴 그녀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내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그 저주 같은 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이정표는 간명하게 길을 알려준다. ‘어린 시절 굴복했던 폭력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네들은 다시 묻는다. ‘어떻게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느냐?’ 말하는 이정표라는 죄로, 다시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때의 양아치 같은 이들과 치고받아야 한다.’ ‘그때의 비웃던 친구 같은 이들 앞에서 춤추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들도 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돈을 벌고, 멋진 몸을 만들어도 그 열패감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꿈과 소질

     

그 둘 뿐만 아니라, 이정표를 본 많은 이들의 반응 한결같았다. “저는 그런 것에 소질이 없어요. 그건 저랑 안 맞아요.” 그 말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치고받는 운동에 소질 없는 사람이 있다. 춤추는 것이 자신과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던 이유도 나에게 어느 정도 복싱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 이정표는 옳다. 이정표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인생은 야박하게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옳은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옳다. 그 길이 야박하다해도 어쩔 수 없다. 그보다 인생이라는 것이 더 야박하니까. 하지만 한 동안은 저주 같은 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이들에게 명쾌하게 길을 알려주지 못했다. 나의 예외적 경우를 일반화해서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복싱·춤에 최소한의 자질도 없는 이가 그것을 하다가 얻어터지고 비웃음을 받아서 마음의 상처만 더 얻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복싱 체육관으로 찾아왔다. 동네 양아치에게 돈을 빼앗겼던 그.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이정표를 따라 길을 나서보고 싶다고 했다. 체육관에서 며칠을 지켜봤다. 암담했다. 힘과 체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최소의 리듬감도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가벼운 스파링에도 두려움에 벌벌 떨며 몸이 얼어붙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복싱에 소질 없어 보였다.      



수행하는 마음     


아니나 다를까? 스파링만하면 얻어터지는 게 일이었다. 심지어 중학생한테까지 얻어터졌으니 더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많이 맞아서 턱에서 딱딱거리게 난다’는 이야기에 이제 걱정이 아니라 후회되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몸과 마음 모두에 더 큰 상처만 생기는 것이 아닐까?’ 후회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복싱 힘들지 않냐?” 그는 답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고 괜찮아요.”   

     

 그는 자신을 믿었던 걸까? 아니면 이정표를 믿었던 걸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2년 6개월을 체육관에서 수행했다. 시간이 흘러 그의 움직임을 보고 놀랐다. 체력과 힘이 좋아졌고, 나무토막 같던 움직임은 리드미컬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스파링의 두려움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생활체육 복싱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했다. 이제 일반인들 중에 그를 이길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대견한 그에게 물었다. “저주 꿈을 이뤘냐?” 그가 돌린 답은 더욱 대견했다. “꿈을 이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시합 날 설사는 안 해요. 예전에는 시합 날 너무 긴장해서 항상 설사했는데. 그 자유로워진 느낌이 너무 좋네요.” 그는 오락실에서 양아치들에게 돈을 빼앗겼던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가 링에서 수도 없이 치고받았던 상대는 바로 그의 마음속 양아치들이었다. 그 두려웠던 상대들과 치고받았던 게다. 그렇게 그는 폭력에 굴복했던 열패감을 떠나보냈다. 이제 링 위에서 능숙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은 그래서 일 테다.     

 

넘어야만 하는 산     


‘안 되는 건 없다. 안 하는 것일 뿐’라는 표어는 틀렸다. 하지만 ‘안 느는 것은 없다. 안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표어는 옳다. 그의 복싱 성장기를 보면서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프로복서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처음 체육관을 찾았을 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복서가 되었다.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중요한 건 자신만의 산을 넘는 것이다. 넘어야 하는 산. 그는 그 산을 넘었다. 산을 올라 자유를 얻었다.     

    

 넘어야 할 산은 넘어야 한다. 우리에겐 다들 그런 산이 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우리를 묶어 버린 그 산.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끝끝내 자신만은 결코 속일 수 없는 그 산. 반드시 그 산이어야 한다. 다른 산은 아무리 올라봐야 잠시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주 같은 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이 빌어먹을 인생은 우리의 소질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니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면 우리 역시 소질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그 산을 기어 올라가는 담대함과 강건함이 필요하다. 그 담대함과 강건함만 있다면 모두 그 산을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그 산을 기어 올라간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 춤을 추고 싶어 하던 아이는 그 산을 넘을 준비가 되었을까? 그녀도 그처럼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 질 수 있을까? 나는 기꺼이 그녀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한 이정표가 되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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