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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지 않은 싸움은 없다.

'생체 시합'은 절박하고 위험하지 않을까?

생체 시합은 절박하고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 ‘반달’이다. ‘반달’은 건달도 일반인도 아닌 사람을 일컫는 속어다. 완전히 어둠의 세계에서 주먹을 쓰며 사는 ‘건달’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먹을 전혀 쓰고 살지 않는 ‘일반인’도 아닌 존재. 나는 체육관에서 딱 그런 존재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 주먹을 쓰지 않는 삶을 산다. 하지만 또 체육관에서는 주먹을 쓰는 삶을 산다. 그래서 나는 반달이다. 반달은 일반인들보다 주먹을 잘 쓴다. 그래서 때로 체육관 회원들에게 복싱을 가르쳐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체육관에서 나의 입장은 사범인 듯 사범 아닌 사범이다. 

    

 건달이 어둠의 세계에서 싸움을 한다면, 프로복서는 프로시합을 한다. 그럼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일반인은? 그들은 생활체육 시합을 한다. 생활 체육 시합이 있는 날이면 시합장으로 간다. 체육관에서 함께 땀 흘리며 운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자신만의 싸움을 준비하는 회원들의 코치 역할을 기꺼이 자처한다. 몸 푸는 것을 도와주고, 긴장하지 말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또 시합이 시작되면 링 사이드에서 상황에 맞게 전략 전술을 목청을 높여 말해준다. 그 모든 일들을 나의 싸움처럼 진지하게 임한다.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진지하게 일반인들의 생활체육 시합을 코치해주는 관장과 사범들이 있다. 그네들을 보고 어떤 관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생체 시합을 뭐 저렇게 진지 빨고 있냐? 쪽팔리게. 애들 시합인데.”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프로 시합까지 뛴 ‘반달’이기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프로 시합에 비하면 생체 시합은 절박감도 위험성도 현저히 낮다. 왜 안 그럴까?  

    

 프로 선수는 매 시합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생업이니까. 그래서 절박하다. 또 보호 장구 없이 치고받아야 하는 프로 시합은 꽤나 위험하다. 하지만 생체 시합은 취미다. 그래서 훨씬 덜 절박하고 또 덜 위험하다. 그런 생체 시합을 프로 시합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코치하는 것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낯간지러워 보일 수 있다. 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관장이나 사범들은 생체 시합을 우습게 여기거나 장난처럼 대한다.

      

 하지만 생체 시합을 장난처럼 대하는 관장과 사범들의 속내에는 조금 다른 것이 있다. 그들은 생체 시합이 프로 시합처럼 절박하고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때로 그네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생체 시합을 일부러 폄하하거나 장난스럽게 대한다. ‘나는 생체 시합 따위를 진지하게 코치해줄 만큼 허접한 관장이 아니야!’라는 것을 간접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 한다. 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겁하며 졸렬한가.


      

소중하지 않는 싸움은 없다.


“왜 이제 생체 시합장에서 회원들 미트 안 받아주세요?”라는 질문에 어느 관장이 이리 답했다. “다른 관장님들이 쪽팔리게 뭐하는 짓이냐고 해서 그냥 안 해요.” 평소 친하게 지냈던 그 관장에게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생체 시합을 진지하게 대할 것이다. 소중하지 않은 싸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달’이라서 잘 안다. ‘건달’은 일반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반달’은 다르다. 완전히 ‘건달’이 아니기에 일반인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하려고 한다. 일반인으로 시작해서 프로 복서까지 오면서 스파링 한 번 한 번이 늘 두려웠고 어려웠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싸움일 수 있겠지만 내게는 늘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생체에 나오는 이들 역시 그런 심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가정과 직장, 그 무거운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싸움을 하러 링에 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싸움이 프로 복서의 싸움보다 덜 절박하다거나 덜 위험하다 말할 수 없다.


      

 일반인에서 프로복서로, 그리고 반달이 된 지금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싸움은 없다는 걸. 자신의 한계점에서 물러서지 않고 한 발을 내디디려는 모든 싸움은 소중하다. 그들은 이미 강하다. 오히려 그 소중한 싸움을 폄하거나 장난스럽게 대하려는 이들은 나약하다. 타인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나약한가. 그렇게 비겁한 방식으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는 이들은 얼마나 졸렬한가. 

    

 프로복서를 지나와 다시 글을 쓰는 삶 위에 서 있는 나는 다짐한다. 누구의 싸움이 더 절박한지 더 위험한지를 따져 묻는 나약하고 졸렬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꼭 링 위가 아니라도 좋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만의 소중한 싸움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진지하게 응원하고 싶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링에서 내려왔지만, 나의 싸움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규정하고 한계 짓는 그 한계점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테다. 나는 복서니까. 그리고 작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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