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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을 꿈꾸는 제자에게

자신을 욕망하는가? 영상을 욕망하는가?

영상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상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조금 안다. 그 믿음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어려운 시작한다.      


“내가 직접 주제를 정하고 나의 생각을, 나의 스타일대로 표현하는 걸 만들어봐야겠다.” 이렇게 말하며, 너의 욕망이 영상이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정말 영상을 욕망하고 있을까? 어떤 간섭이나 통제 없이 영상을 만들고 싶어 하고, 특정한 간섭과 통제가 들어왔을 때 영상을 만드는 욕망은 급격히 식어버린다. 거칠게 말해도 좋다면, 예전의 네가 오락 속에서 ‘신’이 되고 싶었다면 이제 영상 속에서 ‘신’이 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둘이 같은 '신'은 아닐 테다. 전자가 소비하는 ‘신’이었다면, 후자는 생산하는 ‘신’이니까. 신으로 군림하려는 너의 욕망이 너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 너는 영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너 자신을 욕망하고 있지. 자신의 세상을 깨고 세상에서 나서기보다 또 다른 견고한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욕망하는 것은 예전과 같다 할지라도, 욕망의 결이 달라졌으니까. 소비하는 욕망에서 생산하는 욕망으로. 그 달라진 결이 모든 것을 바꿀 테다.

      

 하지만 약간의 노파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제 이제 ‘함께’ 영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그 노파심에 관련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영상을 만들려는 감독이 있다.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자기가 원하는 장면과 음향이 나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감독. 어제 이런 종류의 감독을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다는 노파심이 든다. 이런 부류 역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나는 이런 감독도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런 강박적 감독이라 할지라도, 결국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함께’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와 마주침으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고 더 넓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아무리 강박적 감독이라고 그 과정 없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모든 작품은 대화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나누는 대화. 진정한 대화는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타자의 세계를 받아들인 사람만 가능하다. 


 이제부터, 네가 정말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게 될 테다. 여전히 너 자신을 욕망하는지, 아니면 영상을 욕망하는지. “좋은 영상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만드는 거야!”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어 여전히 작은 ‘나’의 세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여전히 ‘자신’을 욕망하는 것일 테다. “내 스타일 아니면 어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볼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때 너는 진정으로 ‘영상’ 욕망하는 것일 테다.   

   

 성찬아. 어떤 경우에도 ‘성찬’이 만들고 싶은 영상을 만들어라. 하지만 그 ‘성찬’이 어제의 ‘성찬’과 같은 '성찬'은 아니기를 바란다. 많은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진 ‘성찬’이기를 바란다. 그 '성찬'의 너머의 '성찬'이 자신 마음대로 만든 영상을 기대한다. 진정한 ‘내’ 스타일은, ‘타자-되기’ 스타일이다. 진정한 '나'는 '타자가 되어가는 나'이니까. 너의 오랜 팬으로서 좋은 영상을 기다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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