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철학을 표방하고 있다. 철학이 일상과 떨어지면 곧바로 허영으로 추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답해준다. 고민이야말로 일상의 응결체니까. 그런 고민을 듣고 답하는 것이 때로 고되고 답답하기는 했으나 염증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은 자부심이기도 했다. 나의 철학이 아직은 허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자부심.
기사를 읽었다. 60대 노모가 40대 지체 장애인 아들을 목 졸라 죽였다는. 나의 생활철학에 대한 자부심은 순식간에 날아갔고 그것이 염증처럼 느껴졌다. ‘돈이 없어서 힘들다, 부모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롭다, 폭식을 하는 자신이 싫다, 애정이 식은 남자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기보다 가기 싫은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겠다.’ 이런 고민들에 대해 답해오고 있던 내가 싫어졌다.
주제넘게 누구의 고민이 누구의 고민보다 더 깊고 아프다는 알량한 가치판단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남의 등에 꽂힌 칼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 더 아픈 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못내, 60대 노모의 얼굴이 아른거려 내가 싫어진다. 그 노모의 일상은 나의 일상 밖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버려서.
자신이 쇠약해져가고, 아들의 폭력성은 날로 심해져 가는 일상. 그 일상이 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는 일상. 그리고 목을 졸라서 맥박이 조금씩 옅어지는 감촉을 느끼며 아들을 죽여 가는 일상. 나의 일상에 매몰되어 그 노모의 일상을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 싫어진다. 그 노모의 일상을 보지 못해, 어딘가에 존재할 남은 그 노모들이 있다는 사실에 아프고 미안하다.
생활철학을 표방한다는 것이,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노모의 아픔으로 그것을 깨닫는다. ‘나’의 생활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너’의 생활마저 ‘우리’의 생활로 끌어들이는 철학. 그것이 생활철학이다. 나는 이제 나의 '생활철학'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
“할머니, 이제 조금 쉬세요. 나머지는 삶은 저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