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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대처하는 자세

몇 번의 후원을 받은 적이 있다. 생활이 급해 개인적인 용도로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착복해 본적은 없다. 사정이 힘들지만 수업을 듣고 싶다는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던 이들, 혹은 삶이 정말 힘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그 후원금을 내어주었다. 대충 계산해보면, 내가 후원받은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후원했을 테다. 이 모든 것이 내 호주머니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마음이 편했다. 다스릴 사람은 나 자신 뿐이었으니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좀 손해 보고 살면 어떤가’라는 마음을 지속하는 것으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다.   


 철학흥신소 공간은 네 명이서 힘을 모아 세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후원도 공동계좌로 받았다. 마음 한 편이 복잡하다.  돈만큼 사람을 치사스럽게 하는 물건도 없다. 개인은 선해도, 그 개인이 모여서 악해지는 것은 너무 흔한 일 아닌가. ‘우리가 제일 힘들지.’ ‘우리는 손해 봐서는 안 되지’라고 ‘선’한 개인들의 ‘악’한 공동체는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각자의 마음을 다스릴지 못해, '악'한 공동체로 변질되어 갔던 '선'한 개인들의 연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참 무거운 일이다. 돈은 치사스러운 것인 동시에 한 사람의 땀과 피인 까닭이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한 사람의 땀과 피인 사실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기만이다. 동시에 누군가의 땀과 피를 착복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후원을 받지 않는다면 모를까, 조금의 후원이라도 받았다면, 그 후원만큼의 한 사람의 땀과 피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후원금을 받으며 노파심이 든다. 후원을 받았다면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 후원금은 공동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남겨진다. 우리는 어떤 공적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를 공적 역할로 볼 것인가? 후원금을 받으며 우리 넷에게 남겨진 숙제다.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한다면 ‘선’한 개인들의 ‘악’한 공동체가 도래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어떻게 해야할까? 

       

 구체적인 규칙 따위는 정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후원금을 더 힘든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애썼던 마음처럼, 함께하는 세 명의 요원들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줄 것이라 믿고 싶다. 언제나 규칙보다 마음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니까. 나도, 나와 함께하는 세 명의 요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철학흥신소라는 공간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좀 손해보고 살면 어떤가’ 이 공동체가 가성비 좋은 사랑 자판기가 아니라, 더 사랑을 주지 못해 아파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철학흥신소가 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제일 어려운 사람이야’ ‘나는 절대 손해보고 살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조금 더 많이 보듬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크고 작은 후원 모두 고맙습니다. 저희에게 남겨진 숙제 잘 고민해서 크게 ‘선’한 공동체는 못되더라도, 욕망을 따르는 삶을 구축할 수 있는 공동체로 잘 꾸려갈게요.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즐겁고 유쾌한 일을 잔뜩 벌일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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