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좋은 점을 가르쳐야 한다네. 고독과 화해시키는 것이지. 그것이 교수로서 나의 역할이었네.” 질 들뢰즈.
조해진 선생의 소설, 「사물과의 작별」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나’와 ‘고모’ ‘나’는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서 일한다. 잃어버린 존재들이 모인 곳이 ‘나’의 일터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존재, 혼자 남겨진 존재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고모’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자마자 사직서를 내고 집을 정리하고,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 두 마리마저 떠나보냈다. 그렇게 주저 없이 남은 삶을 정리하고 스스로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고모는 모든 사물과 작별했다. 정말 모든 사물과 작별했다. 기억마저 잃어가고 있었으니, 정말 모든 사물과 작별하는 중이다. 우리가 사물들과 작별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는”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 아닌가. '고모'는 그 기억마저 잃어가는 중이기에 정말 모든 사물과 작별 중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고모’에 대한 애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혼자 남겨진 존재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혼자 남겨진 존재의 빛을 볼 수 있을 만큼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다.
그 섬세한 감수성은 '나'가 유실물의 빛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간혹 유실물에서 빛이 날 때가 있다. 일년 육개월이라는 보관기간을 채우고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처리가 되기 직전, 홀연히 나타났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빛이었다. 그때 마다 나는,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 하는 유실물이 세상에 보내오는 마지막 조난신호를 본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혼자 남겨진 존재에 대한 애정으로 ‘나’는 ‘고모’를 돕는다. 어린 날의 ‘고모’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씻어지는 않았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헛되게 마무리된다. ‘고모’의 죄책감은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다시 유실물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은, 제목처럼 ‘사물과의 작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슬펐다”라는 말로 끝맺는 이 소설은, 슬프다.
나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좋은 소설을 외면하는 이유를 알겠다. 좋은 소설은 슬픔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즐거움을 좇을 뿐, 슬픔을 좇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은 분명 선물이다. 세상 사람들은 슬픔이 왜 선물인지 알지 못하기에 좋은 소설에서 멀어져 가는 일 테다. 사물과 작별해서 혼자 남겨지는 삶은 슬프다. 직장도 잃고, 집도 잃고, 사랑하는 고양이도 잃고, 심지어 기억마저 잃어버린 삶은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래서 슬픔을 주는 소설은 선물이다. 슬픔이 오기 전에 슬픔에 대해서 고찰해볼 수 있게 해주니까.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을 조금은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사물과의 작별’은 유실물처럼, 혼자 남겨짐의 슬픔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과 화해하게 해준다. 이 소설을 읽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과 가질 수 있는 관계는, 학생들이 그들의 고독에 대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네. 그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항상 이야기하지. ‘소통이 필요해. 사람들은 누구나 외로워하니까’ (중략) 그들의 고독안에서는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라네. 그들에게 고독의 좋은 점을 가르쳐야 한다네. 그들을 고독과 화해시키는 것이지. 그것이 교수로서 나의 역할이었네.” 질 들뢰즈
들뢰즈는 긴 세월 선생으로서 역할을 끝내고 난 후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들뢰즈는 철학으로 학생들에게 고독, 그러니까 사물과의 작별 이후에 남겨지는 슬픔을 긍정하는 법을 가르치려 했다. 그것이 자신의 선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철학을 공부하는 나는, 들뢰즈를 사랑하는 나는, 들뢰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 고독과 화해하지 못한다면 삶을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을.
들뢰즈의 이런 가르침이 꼭 철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고독과의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악, 그림, 그리고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긍정하는 것은 소설로도 가능하다.「사물과의 작별」을 읽으며 슬퍼졌다. ‘삶은 언제나 이렇게 매몰차게 외롭고 서러운 것이구나.’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들렸던 웅성거림이었다.
소설보다 들뢰즈를 먼저 만난 덕분이었을까? 그 슬픔의 웅성거림이 그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슬픔을 통해 나는 조금 더 고독과 화해하게 되었다. 내게도 분명 소중한 무엇인가를 떠나보내야 했을 때가 찾아올 테다. 그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선물은 기쁨을 주듯, ‘슬픔을 주는 소설’이라는 선물은 그렇게 내게 역설적인 기쁨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