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 사랑의 밀도

'사랑의 온도' 차를 느낄 때는 미안하고, '사랑의 밀도' 차를 느낄 때는 서글프다. s.spinoza



사랑의 차이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다. 이는 사랑이 ‘하나’가 되려는 행위가 아니라 단독적인 ‘둘’이 그대로 존재하는 행위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랑에는 언제나 묘한 긴장감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둘이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하나가 되려는 사랑은 ‘폭력’이다. 하지만 거기에 ‘차이’는 없다. 하나가 되려고 하기에. 어쩌면 사랑을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차이’를 감당하지 못해서, '차이'의 자리에 ‘폭력’을 채워 넣으려는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둘의 경험이라면, 그 경험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긍정하는 경험이다. 하지만 둘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하는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활의 차이일까? 달리 말해, ‘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액션 영화와 감자탕을 좋아하고, ‘너’는 저녁형인간이고, 멜로 영화와 파스타를 좋아하는 차이일까? 아니다. 그런 생활의 차이는 아무런 긴장감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미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나’의 ‘너’를 향한 사랑으로, ‘나’는 저녁형인간이 되어가고 있을 테고, 멜로 영화와 파스타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을 테니까. 사랑이 시작되면 생활의 차이는 더 이상 차이가 아닌 것이 된다. 생활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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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온도


하지만 사랑하는 둘에게 남겨진 '차이'가 있다. ‘사랑의 온도’와 ‘사랑의 밀도’ 차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온도’는 다르다. 온도는 환경적이고 조건적인 변수다. 어느 사물의 온도는 주변의 온도에 따라 변한다. ‘사랑의 온도’도 그렇다. 출근길에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나’의 ‘사랑의 온도’는 올라간다. 이 아름다움과 설렘을 ‘너’에게 전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다.


벚꽃 사진 한 장과 듣고 있던 음악을 ‘너’에게 보낸다. 하지만 어제 야근을 끝내고 밀린 잠을 자고 있던 ‘너’는 ‘나’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온도’ 차이 일 뿐이다. 사물의 온도가 환경적이고 조건적인 변수이듯, ‘사랑의 온도’ 역시 그렇다. 그것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니까.


사랑의 밀도


‘사랑의 밀도’ 차이가 있다.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어도, 거기에는 ‘사랑의 밀도’ 차이가 난다. 밀도는 사물의 고유한 값이다. ‘사랑의 밀도’ 역시 그렇다. '사랑의 밀도'는 ‘사랑의 온도’처럼 그때그때 변하지 않는다. 둘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각자의 ‘사랑의 밀도’는 다르다. 자신만이 중요한 삶을 살아왔던 이의 고유한 ‘사랑의 밀도’가 있다. 또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경험했던 이의 고유한 ‘사랑의 밀도'가 있다. 이 '사랑의 밀도'는 고유하기에 언제나 차이가 난다.


“약속을 했으며 시간에 맞춰 나와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너’를 소중 대하지 못할 때가 있다. ‘네’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아니다. '내'가 일이 많아서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바쁜 일은 잘 해결되었어?” ‘너’는 부모님이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도 ‘나’를 먼저 생각하며 소중히 대해준다. 둘의 ‘사랑의 밀도’는 다르다. ‘나’의 밀도 낮은 사랑, ‘너’의 강밀한 사랑. 둘이 사랑하더라도, ‘사랑의 밀도’는 다를 수 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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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차이'가 남기는, 미안함과 서글픔


‘사랑의 온도’ 차이를 느낄 때는 미안하다. 흐드러진 벚꽃 사진과 음악을 보낸 ‘나’는 미안하다. 괜히 ‘나’의 감성에 빠져서 피곤한 ‘너’를 깨운 것 아닌가 싶어서. 벚꽃 사진과 음악을 받는 ‘너’도 미안하다. 그깟 일이 뭐라고 늦잠 자느라 ‘나’의 ‘사랑의 온도’를 충분히 나누지 못해서. ‘사랑의 온도’는 가변적이기에 그것을 느낄 때 미안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가변성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의 미안함이다.


‘사랑의 밀도’ 차이를 느낄 때는 서글프다. ‘너’에게 부질없는 짜증을 내는 ‘나’는 서글프다. ‘나’의 지난 삶의 남루함을 확인하게 되니까. 그래서 ‘나’의 한 없이 낮은 ‘사랑의 밀도’를 확인하게 되니까. 사랑하는 ‘너’를 이렇게 밖에 사랑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남루해서 서글프다. '너'도 서글프다. ‘나’의 의미 없는 짜증을 묵묵히 받아내던 ‘너’도 서글프다. '나'의 지난 삶에 '너'가 해줄 수 있는 것 없음을 확인하게 되어서. 둘의 ‘사랑의 밀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서. 그래서 얼핏 '나'와 '너'의 사랑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서.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둘의 경험이다. 그래서 사랑의 차이는 필연적이다. 그 차이는 미안함과 서글픔으로 찾아온다. 사랑,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미안함과 서글픔이 순수한 슬픔인 것은 아니다. 생활의 차이 조차 넘어서지 못하며 사랑한다고 떠드는 이들에게는 남겨지는 것이 순수한 슬픔이다. 사랑의 차이로 남겨지는 미안함과 서글픔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되돌아 보면 알게 된다. 사랑의 차이로 인해서 피할 수 없었던, 그 미안함과 서글픔은, 진짜 사랑을 했었기에 겨우 찾아온 기쁨이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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