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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탐욕

무주상보시

 이타적 탐욕은 내 눈 앞에 있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내 눈 앞에 없는 '너'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s. spinoza



돈은 벌어야 하는 것이지, 벌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제 내게 돈은 그런 존재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스며들지 않은 영역이 없는 시대 아닌가. 돈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하다. 그러니 먹고 살만큼 돈은 벌어야 한다. 하지만 더 벌고 싶지는 않다. 필요 이상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이 내겐 없다. 철학과 글쓰기로 긴 시간 버텨온 삶이 내게 남긴 선물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돈에 대한 과도한 욕망. 탐욕이었다.


 그 탐욕은 기묘하게도 ‘나’를 위한 탐욕이 아니라 ‘너’를 위한 탐욕이었다. 여기서 ‘너’는 혈육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 새끼를 위한 탐욕은 전혀 기묘하지 않다. 자기 새끼는 ‘너’가 아니라 또 다른 ‘나’일 뿐이니까. 자기 새끼를 위해 돈을 더 벌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위한 탐욕일 뿐이다. 나 역시 내 새끼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위해 밥벌이를 하겠지만 그건 탐욕이 아니다. ‘나’를 위한 탐욕이 줄어들어가며, 내 새끼들을 위해 돈을 더 벌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어갔으니까.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 내게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도 못가고 알바를 하며 고된 삶을 이어가는 ‘너’, 몇 년을 공황장애로 방에서 지내다 이제 사회로 나와 일을 하며 힘겨워하는 ‘너’, 몇 달치 임금이 체불되어 곤경에 처한 ‘너’ 이런 ‘너’들을 만나면서 돈을 더 벌고 싶어졌다. 돈을 더 벌어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탐욕이 생겼다. ‘너’를 위한 탐욕. 이는 이타적 탐욕인 셈이다.


내게 다시 찾아온 탐욕, 그러니까 이타적 탐욕을 성찰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타적 탐욕은 없다는 것을. 탐욕은 탐욕일 뿐이다. 모든 탐욕은 모두 ‘나’를 위한 탐욕일 뿐이다. 탐욕과 인정욕은 연결되어 있다. 탐욕에 대해 조금만 깊이 고민해보면 알게 된다. 탐욕은 돈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탐욕은 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지만 그 욕망은 돈 그 자체와 아무 관련이 없다.  

    

 탐욕은 인정욕과 직접적으로 관계 되어 있다. 타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그 뿌리 깊은 인정욕구를 해소하고 싶은 것이다. 탐욕이 언제나 소위 명품을 향해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너’를 위한 탐욕은 이타적 탐욕일까?  얼핏 그런 것도 같다. 나는 돈을 더 벌어서 ‘나’를 위해 쓰지 않을 테니까. ‘너’를 위해 쓸 테니까.  하지만 이타적 탐욕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왜 돈을 더 벌어서라도 ‘너’를 도와주고 싶었을까? ‘너’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마음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너’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너’들에게 더 훌륭한 선생이 되어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 모종의 권력욕이 은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보지 못했던 게다. 아직 마주치지 못했을 뿐,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힘든 삶을 겨우 버텨내고 있는 ‘너’들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대승불교의 실천덕목 중 하나다. 베풀었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진정한 베풂이 아니며, 베풀었다는 마음 자체가 없어야 진정한 베풂이라는 의미다. 이타적 탐욕은 ‘무주상보시’가 아니다. ‘너’에게 베풀더라도, 우리는 그 베풂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 기억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우리가 언제나 가까운 ‘너’, 친한 ‘너’에게만 베풀려고 하는 이유다. 그 베풂을 ‘나’도 ‘너’도 잊지 않기를 바라니까. 


 꼭 물질적인 대가가 아니라도, ‘너’가 그 베풂의 대가를 언젠가는 ‘나’에게 되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은밀한 그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이타적 탐욕은 없다. ‘너’를 위해 돈을 더 벌고 싶다는 마음은 ‘나’의 이기심이다. '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이기심. '너'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기심. '너'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기심.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들을 되돌려 받고 싶다는 이기심. 이것은 이타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주상보시’는 어떻게 가능할까? 베풀었다는 것을 잊고 다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멀어 보인다. 우리는 베풀면서도 언제나 은밀한 곳에서는 본전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되돌려 받을 본전이 물질적인 것일 때 누군가를 천박하다 여기고,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닐 때(관심, 인정, 칭찬, 찬양등) 누군가를고상하다 여기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던가.


 무주상보시는 ‘너’에게 베풂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 ‘너’는 드러난 ‘너’가 아니라 잠재적 ‘너’들을 향해 있어야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이들에 대한 베풂.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무주상보시일 수밖에 없다.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돈을 번다는 것. 그것은 합법과 불법의 차이만 있을 뿐,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지구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으까.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어쩌면 돈을 최대한 적게 버는 것이 돈을 많이 벌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보다 무주상보시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탐욕이 찾아온 삶에서 한동안 배회하며 알게 되었다.  이타적 탐욕은 내 눈 앞에 있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내 눈 앞에 없는 '너'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이 지난한 수행 끝에, 내 눈 앞에 있는 ‘너’에게, 내 눈 앞에 없는 ‘너’에게 베풀면서 동시에 그것을 잊을 수 있게 되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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