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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진짜 문제

“가난은 심각한 문제인가?”
“그렇죠.”
“왜 그런가?”
“가난하면 자존감이 낮아지니까요”     


 가난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해 상대적 가난만을 경험해본 이다. 진짜 가난해본 사람은 안다. 자존감 따위는 아무 문제도 아니란 걸. 가난은 생계의 문제다. 가난해서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이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동생과 반나절을 장롱을 들어내고 온 집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 집안에 있을지 모를 동전을 긁어모아 라면 하나를 사기 위해서. 가난이다. 가난하면 생존과 생계를 위협받는다.


 그렇다면, 생계의 문제가 가난의 가장 큰 문제인가? 아니다. (예외적인 아주 불행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면) 성인이 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 자신의 밥벌이는 할 수 있다. 언제까지나 동전을 긁어모아 라면을 사야하는 아이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야박하게 말해, 생존과 생계의 문제 역시 가난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가난의 심각한 문제란 말인가?

      

 ‘사랑의 가림막’ 이것이 가난의 심각한 문제다. 가난했던 이는 사랑을 보지 못한다. 가난했던 이가 가난을 벗어났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랑했던 이가 생일 날 편지를 써주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걸로 때우려는 거야?” 부끄럽게도, 나는 그녀의 사랑을 보지 못했다. 정성스럽게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쓴 그 사랑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단지 돈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의 사랑을 의심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지독히도 가난한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도식이 있다. ‘돈=가장 중요한 것’ 당연하지 않은가. 생계를 위협당할 정도의 가난을 경험해본 이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가난했든 부유했든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다. 여기서 가난했던 이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했던 이는 사랑 그 자체를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 싶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을 받을 때 사랑받음을 느낀다. 가난했던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기에, 사랑 역시 돈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돈을 주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돈을 받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가난은 사랑을 가린다. 서글픈 일이다. 편지를 써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편지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일. 이것이 가난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가난했던 이들이 사랑마저 보지 못하는 것. 이를 지켜보는 것보다 아픈 일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난을 극복해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해야 가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 옳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중요한 것은 ‘돈=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내면의 도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그것이 가난의 심각한 문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가림막 너머의 사랑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사랑 그 자체를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가난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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