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섹스'
섹스의 즐거움
섹스는 즐거운 일이다. 욕구를 해소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금지된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즐거움이 섹스가 주는 즐거움의 전부일까? 아니다. 섹스의 진정한 즐거움은 ‘대화’에 있다. 섹스는 서로의 실존을 온 몸으로 껴안는 행위다. ‘실존을 껴안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못했던 온전한 모습을 서로 오롯이 이해한다는 의미다. 서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서로를 오롯이 이해가 된 것이다.
섹스라는 ‘대화’는 일상의 대화 다르다. 그래서 일상의 대화는 아무리 많이 떠들어봐야 실존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섹스라는 ‘대화’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섹스는 탈脫언어적 대화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는 사실 대화가 아니라 오해에 가깝다. 직장, 친구, 가족 등 대부분의 일상의 대화는 서로의 마음과 감정을 섬세히 살피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바쁜 까닭이다. 그것이 일상의 대화에서 오해가 난무하는 이유일 테다.
온전한 대화는 언어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탈脫언어적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과 감정이 전달되는, 언어 너머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다. 실존의 주고받음은 그런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섹스는 우리에게 그런 대화를 가능케 할 문을 열어준다. 왜 안 그럴까? 온 몸을 물고, 빨고, 껴안는 행위 안에서는 아무 말 없이 존재 자체를 서로 나누게 된다. 그때 온전히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충만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섹스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섹스의 공허감
우리의 섹스로 돌아오자. 우리는 섹스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섹스를 통해 성적 욕구를 해소했다. 하지만 즐거움보다는 기묘한 공허감과 허무함에 느낄 때가 있다. 섹스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공허와 허무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운하게 처음 몇 번의 섹스에서 이런 공허와 허무를 만나게 된 이들에게 찾아온다.
불운한 이들에게 섹스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불쾌한 어떤 것이 된다. 불운은 언제나 안타까운 일이다. 섹스의 즐거움은 삶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삶에서 만끽할 수 있는 큰 즐거움을 하나 놓치고 사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다. 섹스의 공허감과 허무함은 당황스럽고 불운한 일이다. 이런 안타까운 일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섹스 뒤에 공허감과 허무함이 찾아올까요?” 먼저 스피노자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스피노자의 섹스
"욕정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스피노자는 섹스하고 싶은 마음(욕정)을 ‘욕망’으로 정의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욕망’이 무엇인가?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는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주석) 욕망은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의 충동이다.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 매혹적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보자. 그때 ‘저 사람과 섹스하고 싶어!’라는 마음에 휩싸일 수 있다. 그것은 충동이다. 또 그때 “나는 지금 ‘저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라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라고 자신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욕망이다. 말하자면, 충동이 욕망을 가능케 하는 셈이다. 충동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충동은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며,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9, 주석)
‘그건 충동적인 결정이야!’ 여기서 알 수 있듯 우리에게 ‘충동’이란 단어는 부정적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 충동을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충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는 충동과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목이 마를 때 마실 것을 욕망(충동)한다. 피곤할 때 자는 것을 욕망(충동)한다. 욕망(충동)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다면 살 수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욕망(충동)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삶의 활력이 커지고 그 반대일 때 삶의 활력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이제 스피노자가 섹스를 어떻게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욕정은 욕망이다. 즉,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욕망이다. 이는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을 따를 때 삶의 활력은 커지고 그것을 억누를 때 삶의 활력은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네 삶을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충분히 섹스를 하는 사람은 유쾌하고 활력 넘치는 일상을 산다. 반면 어떤 이유에서든, 충분히 섹스하지 못하는 사람은 섹스 생각에 매여 삶 전반의 활력이 떨어진다. 혹은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일상을 살게 된다.
이는 다른 욕구도 마찬가지다. 식욕을 생각해보자. 충분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삶 전반이 유쾌하고 활력 넘친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충분한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 그 사람은 항상 식욕이 억압된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매순간 음식 생각에 매여 우울하고 활력은 줄어들 게 마련이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상을 살게 된다.
섹스가 주는 즐거움, ‘쾌감’과 ‘유쾌’
스피노자에게 섹스는 욕망(충동)이기에 그것을 따를 때 삶의 활력이 증대되고, 그것을 따를지 않을 때 삶의 활력은 줄어든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섹스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자, 그렇다면, 섹스를 하기만 하면 삶의 활력이 커지는 것일까? 분명 그렇다. ‘욕정을 억압하는 삶’과 ‘욕정을 해소하는 삶’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전자보다 후자가 분명 더 큰 삶의 활력을 가져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왜 섹스 뒤에 공허감이 찾아올까요?” 섹스를 하면 분명 삶의 활력이 커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 우리네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마음속에 있는 욕정(욕망)을 따랐지만 때로 공허와 허무와 같은 감정에 휩싸이곤 하지 않던가. 이런 공허와 허무의 감정을 삶의 활력이 증대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스피노자의 ‘쾌감’과 ‘유쾌’의 구분을 통해 답할 수 있다.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기쁨의 감정’을 나는 쾌감 또는 유쾌라고 부른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증명)
‘쾌감’과 ‘유쾌’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기쁨이다. 삶의 활력을 높여주는 기쁨. 하지만 이 두 기쁨의 감정은 여느 기쁨의 감정과 다르다. 예를 들어, ‘희망’, ‘환희’와 같은 기쁨의 감정은 정신에만 관계되어 있다. 신체적 자극 없이도 ‘환희’와 ‘희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쾌감’과 ‘유쾌’는 다르다. 이 두 가지 기쁨의 감정은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기쁨의 감정”이다. (욕정을 해소하는) 섹스는 반드시 ‘쾌감’과 ‘유쾌’를 동반한다. 섹스는 정신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신체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의 비중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욕정을 해소하는) 어떤 섹스든 반드시 정신과 신체 모두 관계되어 있다. ‘원나잇’ 섹스를 생각해보자.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섹스를 하더라도, 그것이 육체적인 관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섹스의 전, 후 그리고 섹스 자체를 통해 미묘한 정서적 교감이 일어난다. 몸을 섞으면서 정신적으로 전혀 섞이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은 별도의 영역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쾌감’은 자위, ‘유쾌’는 섹스
‘욕정을 억압하는 삶’보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이 더 낫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은 반드시 삶의 활력을 크게 한다. 원나잇 섹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욕정 자체를 억압하는 것보다 원나잇 섹스라도 하는 게 더 낫다. 욕망(충동)을 따르는 삶이 더 기쁜 삶이다. 욕정을 해소하는 섹스는, 설사 그것이 원나잇 섹스라 할지라도, ‘쾌감’과 ‘유쾌’라는 기쁨의 감정을 동반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은 모두 같은 삶일까? ‘욕정을 해소하는 삶’이 기쁨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기쁨은 모두 같은 기쁨일까? 쉽게 말해,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의 섹스가 주는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이 원나잇 섹스가 주는 기쁨과 같은 것일까? 아니다. ‘욕정을 해소하는 삶’에는 다양한 결의 기쁨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쾌감’과 ‘유쾌’를 다시 구분한다.
“쾌감(중략)은 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때의 인간에 관계 되어 있지만, 유쾌(중략)는 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 받아 변화되는 때의 인간에 관계되어 있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1, 증명)
‘쾌감’도 기쁨이고, ‘유쾌’도 기쁨이다. 하지만 ‘쾌감’은 신체의 특정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자극받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이다. 반면 ‘유쾌’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이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쾌감은 자위고, 유쾌는 섹스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위는 성기라는 특정한 부분을 자극해서 기쁨을 느끼는 행위고, 섹스는 상대와 키스하고 껴안는 행위를 통해 신체 모든 부분을 자극해서 기쁨을 얻는 행위니까.
‘쾌감’의 섹스 너머 ‘유쾌’한 섹스로
이제 섹스 뒤에 찾아오는 공허와 허무에 조금 더 근본적으로 말할 수 있다. 섹스 뒤에 찾아오는 공허와 허무는 기묘하다. 왜 기묘할까? 그 공허와 허무에는 모종의 기쁨이 항상 엉켜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원나잇 섹스는 공허하고 허무하다. 이는 섹스가 주는 온전한 기쁨에서 무엇인가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정서다. 무엇인가 충만함을 기대했는데 그만큼 채워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공허와 허무를 느끼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그 공허와 허무는 섹스를 통해 ‘쾌감’을 느꼈지만 ‘유쾌’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정서다. 공허와 허무를 남기는 섹스는 서로가 상대를 성기로만 대하는 섹스다. 쾌감만 있는 섹스.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기쁨만을 주는 섹스. 이는 마치 상대의 성기를 통해 자위를 하려는 섹스와 같다. ‘쾌감’만 있을 뿐, ‘유쾌’가 결여된 섹스는 잠시의 기쁨 뒤에 이내 깊은 공허와 허무에 빠뜨린다. 이것이 섹스 뒤에 공허와 허무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섹스 뒤의 공허와 허무로부터 벗어나려면 어찌 해야 할까? 다시 욕망(충동)을 따르면 된다. 어떤 욕망인가? 섹스가 주는 온전한 기쁨을 향한 욕망(충동)이다. 섹스가 주는 온전한 기쁨은 ‘유쾌’다.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 받아 변화되는” 섹스의 기쁨을 만끽하면 된다. 특정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를 하면 된다. 성기에만 집중하는 섹스가 아니라, 온 몸을 만지고 애무해주고 껴안아주는 섹스를 하면 된다.
‘유쾌’한 섹스, 마음의 애무
여기서 스피노자가 심신평행론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부분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는 비단 신체적 모든 부분 너머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부분까지 자극받아 변화되는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온 몸을 정성스럽게 애무해주는 것처럼, 온 마음을 정성스럽게 애무줄 때 진정한 ‘유쾌’를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애무’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소설과 음악, 영화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사랑하는 이의 내밀한 아픔과 상처를 나누는 일. 사랑하는 이의 소중한 꿈을 함께 나누는 일. 육체적으로 충분한 즐거웠다 하더라도, 원나잇 섹스가 헛헛함을 남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룻밤은 신체를 애무해주기 충분할 뿐 ‘마음의 애무’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섹스가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탈脫언어적 대화를 통해서라고 이미 말했다. 이 탈脫언어적 대화는 ‘마음의 애무’까지 확장된 섹스의 다른 이름이다. 신체를 넘어 마음마저 애무해주는 관계에서 언어적 대화는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탈脫언어적인, 마음의 애무까지 확장된 섹스는 결코 공허와 허무를 남기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섹스라는 행위가 주는 기쁨의 정수를 누릴 수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분명하다. 섹스를 확장해나가야 한다. 성기를 넘어 신체 전체로, 신체를 넘어 마음까지 껴안는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쾌감'의 기쁨 너머의 '유쾌'의 기쁨이 가득한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 “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 받아 변화되는” 유쾌한 섹스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