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끌림', '야심'
인스턴트하게 끝나는 사랑
모든 사랑은 끝이 난다.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너’로 변화되는 사랑이 있다. 그런 순도 높은 사랑 역시 끝이 난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온전히 느낀 채 끝이 난다. 그런 이별은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랑의 끝'이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지는 않는다.
인스트턴 사랑이 있다. 쉽게 시작되고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사랑. 이런 사랑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인스턴트 사랑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인스턴트 사랑은 사랑이 주는 다종다양한 기쁨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 그래서 사랑을 냉소하게 만든다. “사랑, 별거 아니잖아.” 이런 냉소는 사랑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에 대해 냉소하고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사랑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경험이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끝나버린 사랑. 그 때문에 사랑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사랑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랑이 금방 식어버릴까요?” 먼저, 스피노자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스피노자의 ‘사랑’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
스피노자의 '사랑' 개념은 어렵지 않다. 먼저, 사랑은 기쁨이다. 외적 원인(한 사람)의 관념(생각)을 떠올렸을 때 생기는 기쁨. 그 사람과 직접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생긴다면 사랑이다. 직장 동료나 친구 들 중에 직접 만났을 때는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이들을 향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은 없는 까닭이다. 쉽게 말해, 스피노자의 사랑은 어떤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해묵은 오해 하나를 규명할 수 있다. ‘사랑은 의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왜 사랑이 금방 식을까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 간명하다. 의지부족이다. 사랑의 의무를 이행할 의지 부족. 이런 부류는 사랑이 금방 끝나버리는 이유를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인스턴트’하게 끝나는 사랑은 철없는 아이들의 의지박약 즈음으로 치부해버리는 까닭이다. 사랑이 빨리 끝나는 것에 대해 의지부족이라고 진단하는 이들을 스피노자는 이렇게 꾸짖을 테다.
사랑을, 사랑하는 대상과 결합하려는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 정의한 저술가들이 있다. 이 정의는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어느 특성을 표현한다. 그 저술가들은 사랑의 본질을 충분히 명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의 특성에 관해서 명료한 개념을 가지지 못했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
사랑의 의지는 만족이다.
스피노자는 사랑하는 대상(사람)과 결합하려는(함께 있으려는) 의지를 사랑으로 정의한 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그런 의지는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을 하면 나타나는 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사랑하는 자의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지라는 것을 사랑하는 대상의 현존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가지는 만족, 그것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이의 기쁨이 강화되며 적어도 촉진되는 만족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
사랑의 의지는 만족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현존(현재 존재)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만족.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의지는 어디서 올까? 만족에서 온다. 간절히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이를 만났을 때의 만족감, 손잡고 산책하고 키스했을 때의 만족감. 그 만족감이 바로 사랑의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런 황홀한 만족을 주는 이와의 사랑은 목숨을 걸고 지킬 의지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사랑은 기쁨이고 만족이다. 사랑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그 기쁨과 만족의 결과물이다.
논리구조상, 사랑이 원인이고 (사랑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결과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사랑을 해서 사랑의 의지가 생기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의 의지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이는 뒤집어 말해, 사랑이 끝났다면 사랑의 의지 역시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의지부족 때문에 사랑이 빨리 끝난다는 말은 얼마나 황당한가.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말한 오류에 불과하다. 사랑이 빨리 끝나 버린 이유는 의지부족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빨리 식어버리는 진짜 이유는 뭘까?
인간은 기쁨을 쫓는 존재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표상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2) (중략) 정신은 자기의 능력이나 신체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표상하는 일을 싫어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3, 계)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크게 하는 사물을 가능한 많이 생각하려고 하고, 그 반대의 것들을 가능한 적게 생각하려고 한다. 밤낮 없이 축구 생각만 하는 학생이 있다. 그 때문에 학원가는 것을 잊는다. 하루 종일 바둑 생각만 하는 직장인이 있다. 그 때문에 업무 스케줄을 놓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축구·바둑 생각만 하면 몸에 활력이 생기기(신체 활동능력 증대, 촉진) 때문이고, 동시에 학원·업무 생각만 하면 몸이 처지기(신체 활동능력 감소, 억제)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축구·바둑을 생각하면 몸에 활력(신체 활동 능력이 증대·촉진)이 생길까? 축구와 바둑이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축구바둑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인간은 기쁨을 주는 사물을 가능한 더 가까이 하려고 하고, 슬픔을 주는 사물을 가능한 더 멀리 하려고 하는 존재다. 즉,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자연스럽게 기쁨을 쫓는 존재다. 이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표상하는 온갖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28)
기쁨을 주는 유사 사랑
이제 음악, 소설, 영화 등등 세상에 왜 그리도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는지 알겠다. 사랑만큼 큰 기쁨을 주는 사물도 없기 때문이다. 순도 높은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사랑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삶의 큰 활력을 가져다주는지.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삶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쁨을 쫓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기쁨을 쫓는 인간은 사랑을 쫓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물을 현실에 소유하고 유지하려고 (중략) 노력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3, 주석)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는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표상(상상)하는 온갖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온갖 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은 기쁨을 주는 ‘온갖 것’을 집요하게 쫒는 존재다. 사랑은 분명 기쁨을 준다. 그래서 사랑을 쫒는다. 사랑뿐만 아니라 기쁨을 주기만 하면 인간은 그것을 쫒는다. 때로 어떤 대상이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대상을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유사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다. 이런 유사 사랑, 즉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과 유사한 감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끌림’(호감)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호감)이란 우연히 기쁨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
‘끌림’은 대표적 유사 사랑이다. 끌림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쁨을 준다. 그래서 끌리는 것이다. 하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연이냐? 필연이냐?’의 차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발생한 기쁨이 우연적이면 끌림이고, 필연적이면 사랑이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의미는 ‘대체 가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필연적’이라는 의미는 ‘대체불가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어떤 이성에게 끌릴까? 아름다운 외모, 자상한 성격, 해박한 지식, 화려한 언변, 부유함 등에 끌린다. 이는 우연적이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끌림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수 없이 지나갔던 사람 중 우연히 그 사람이 끌림의 요소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체가능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 더 해박한 지식, 더 화려한 언변, 더 부유함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의 끌림은 그 사람에게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끌림’은 우연적 기쁨이다.
사랑은 이와 다르다. 사랑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의 시작은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 사람에게 끌림의 요소가 전혀 없는데도 기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외모도, 직장도, 재력도, 성격도 평소 나의 이상형이 전혀 아닌데 기쁨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 사람은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다. 오직 그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을 느끼게 될 때 사랑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필연적 기쁨이다. 집요하게 기쁨을 쫓느라, 우리는 그 기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파악하지 못해 종종 끌림을 사랑으로 오해하곤 한다.
‘야심’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우리가 표상하는 온갖 것을 또한 행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29)
인간은 기쁨을 집요하게 쫓는다. 이 집요함은 나를 넘어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받는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이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고 여기는 온갖 것들까지 행하려고 노력한다. 평소에는 전혀 사고 싶지 않았던 상품도 “마지막 하나 남은 거예요”라는 말에 눈 길 가는 것도 그래서다. 여기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 감정이 있다. 야심이다.
단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은 야심이라고 불린다. 특히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행하거나 피할 정도로 열심히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할 때 그렇게 불린다. (에티카, 정리29, 주석)
나의 기쁨을 넘어 타인의 기쁨을 쫓는 인간은 야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야심은 있어도, 가난함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서 기쁨을 느끼고, 돈이 많은 사람들을 기쁨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돈을 벌려는 노력은 야심이다. 때로 이 야심이 사랑으로 오해되곤 한다.
야심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기쁨을 쫒으려는 인간에게 매우 강력하다. 너무 강력해서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을 왜곡하기도 한다. 때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야심일 때가 있다. 근사한 외모를 가진 선배에게 사랑 고백을 할 때 그것은 사랑일까? 아니다. 야심이다. 그 선배와 사귀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이라는 야심.
야심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것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그가 부자이거나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서 그와 만나는 경우는 이제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야심일 뿐이다.
사랑이 빨리 식어버리는 이유
“왜 사랑이 금방 식어버릴까요?”라는 물음에 이제 답할 수 있다. 사랑이 금방 식어버리는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끌림과 야심처럼,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기쁨을 주기에 사랑이라고 오해해버린 감정들이 있다. 오해된 감정은 머지않아 곧 자신의 원래 색깔을 드러낸다. 끌림은 금방 식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더 끌리는 요소를 가진 사람은 곧 나타나게 마련이니까. 야심은 금방 식는다. 이 또한 당연하다. 야심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일인데, 대중들만큼 변덕이 죽 끓듯 변하는 존재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끌림’과 ‘야심’이라는 감정이 제 색깔을 드러내어도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첫 사랑을 닮아서 끌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돈으로 나의 야심을 채우고 싶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을 아름답게 덧칠하려는 것은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니까. 이것이 사랑이 금방 식어버렸다고 우기게 되는 이유다. 아니 사랑이 금방 식어버렸다고 믿게 되는 이유다.
항상 기쁨을 쫓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복잡 다양한 감정들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끌림’·‘야심’을 ‘사랑’과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끌림과 야심은 순간적일지라도 분명 기쁨을 준다. 하지만 이런 유사 사랑을 사랑이라 여기게 되면, 그 기쁨은 이내 더 큰 슬픔으로 되돌아온다. 끌림·야심과 사랑을 헷갈린 죄로, 다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상태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냉소’와 ‘사랑의 무의미’는 유사 사랑을 사랑으로 오해해서 일어난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