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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 괜찮을까요?"

스피노자의 '조롱'과 '경멸'

뒷담화의 기쁨


“김부장 발표할 때 봤냐? 세상 제일 똑똑한 척 하더니 말도 못하고 버벅대더라. 졸라 멍청하지 않냐?”


직장은 뒷담화의 보고寶庫다. 뒷담화가 뭔가? 뒤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 아닌가. 직장만큼 이 뒷담화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공간도 드물다. 비단 직장만 그럴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뒷담화가 없는 곳은 드물다. 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혹은 학생이 선생의 뒷담화를 한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서로 뒷담화를 한다. 이처럼 뒷담화가 없는 공간은 이제 거의 없다.


그렇다면 뒷담화는 왜 이리 많은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은 기쁨을 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의 뒷담화를 할까? 슬픔을 주는 존재들이다. 짜증나게 하는 친구나 선배,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생과 부모, 직원들을 무시하는 직장 상사와 사장. 이들은 우리에게 갖가지 종류의 슬픔을 준다. 하지만 기쁨을 쫓는 우리(인간)는 그 슬픔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슬픔을 줄인 만큼이 기쁨이니까. 그래서 우리(인간)는 그들의 뒷담화라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증오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20)


뒷담화는 기쁨을 준다. 어떤 기쁨인가? 자기가 증오하는 것(친구, 선배, 선생, 부모, 상사, 사장)이 파괴되는 것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뒷담화는 나에게 슬픔을 주는 인간들이 파괴되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그 상상으로 기쁨을 쫓아가보려는 것이다. 뒷담화는 나쁜 것이 아니다. 슬픔을 주는 그 많은 존재들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최소한의 기쁨이라도 유지해보려는 애절한 노력. 그것이 뒷담화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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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주는 조롱


뒷담화에도 종류가 있다. 크게 비난과 조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걔 완전 또라이야!”는 비난이고, “걔 졸라 웃기지 않냐?”는 조롱이다. 달리 말해, 비난은 누군가를 근거 없이 욕하는 것이고, 조롱은 누군가를 깔보면서 놀리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뒷담화에는 비난보다 조롱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비난보다 조롱이 더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뒷담화는 기쁨을 쫓는 행위 아닌가. 그런데 비난할 때는 기쁨이 덜하고, 조롱할 때는 기쁨이 더하다.


“걔 완전 또라이야!” 근거 없이 누군가를 비난하는 뒷담화는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걔 졸라 웃기지 않냐?” 누군가를 조롱하는 뒷담화는 우리에게 모종의 기쁨을 준다. 이것이 비난보다 조롱이 뒷담화로서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윤리·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조롱은 분명 기쁨을 준다. 조롱이라도 해야 온통 슬픔뿐인 삶을 그나마 버틸 수 있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인간은 기쁨을 쫓는 존재이니 누군가를 조롱하면서 계속 뒷담화를 해도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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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조롱’


먼저 스피노자가 ‘조롱’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부터 알아보자.


조롱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어떤 것이 우리가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표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스피노자에게 ‘조롱’은 기쁨이다. 어떤 기쁨일까?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상상(표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조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멸’과 ‘증오’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증오’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의 감정이다. 선생·직장상사·부모를 ‘증오’한다고 해보자.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외적원인(선생·직장상사·부모)을 생각하면 각종 슬픔(분노, 복수심, 치욕, 공포) 떠오른다는 말이다. 그것이 증오의 감정이다.


‘경멸’이 무엇인가? 누군가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늘 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A가 있다고 해보자. A는 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경멸’하기에 그네들을 깔보고 업신여긴다. 하지만 이것으로 ‘경멸’의 감정을 설명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멸’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즉, ‘깔봄·업신여김’은 ‘경멸’이라는 감정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지 ‘경멸’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 ‘경멸’의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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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경멸’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의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사물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도록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감동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의 표상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A는 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이는 A의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돈만 밝히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 사물 안에 있는 것’(명품 시계와 가방,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 등등)보다 ‘그 사물 안에 없는 것’(철학, 시, 소설, 음악, 인간애)을 더 많이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상상이 지속되면서 정신을 거의 감동시키지 못하게 되는 감정 상태, 그것이 바로 경멸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경멸, 그러니까 우리가 깔보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젊은이들에게 꼰대(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자기주장만하는 사람이라고 하자)들은 경멸의 대상이다. 젊은이들이 꼰대들을 보면서 그네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개방성, 진보성, 유연성, 창의성)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꼰대들을 보면서 정신이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태가 된다. 그때 젊은이들은 꼰대들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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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의 메커니즘


이제, 조롱이라는 감정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조롱은 ‘경멸’하는 것이 ‘증오’하는 것 안에 있음을 상상(표상)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다. ‘경멸’과 ‘증오’는 다르다. 경멸은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는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증오는 내게 실제로 슬픔을 준 사람에게 갖게 되는 감정이다. 쉽게 말해, 증오의 대상(직장상사, 군대고참, 선생)은 확실히 싫어할 수 있지만, 경멸의 대상(돈벌레와 꼰대)은 확실히 싫어할 수 없다. 돈벌래와 꼰대(경멸의 대상)는 그들을 볼 때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생각날 뿐,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슬픔을 준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직접 슬픔을 주었다면 증오의 감정이 된다.)


경멸의 대상은 우리에게 실제로 슬픔을 준 적이 없다. 그래서 파괴해서 없애 버리는 상상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싫다. ‘경멸의 대상’(돈벌레, 꼰대)은 묘한 존재다. 직접 슬픔을 준적이 없지만 싫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롱이 왜 기쁨을 주는지 알겠다. 조롱은 ‘경멸의 대상’을 파괴해서 없애버릴 상상을 허락한다. ‘경멸의 대상’이 ‘증오의 대상’안에 있다고 상상하면 ‘경멸의 대상’을 마음 편히 파괴하고 없애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롱은 기쁨인 게다. 즉, 조롱은 ‘경멸의 대상’(돈벌레, 꼰대)을 ‘증오의 대상’(파괴해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여길 때 느껴질 때 기쁨이다.


일벌레인 직장 동료가 있다고 해보자. 그 동료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슬픔을 준적이 없다.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없는 것(취미, 연인, 사적인 시간)이 상상될 뿐이다. 여기까지는 ‘경멸’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그 일벌레 새끼, 졸라 팀장새끼가 같지 않냐?”라고 말하는 것은 ‘조롱’(기쁨)이다. ‘팀장’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증오의 대상이니까. 즉, 경멸의 대상(일벌레)이 증오의 대상(팀장) 안에 있다고 상상했기에 느껴지는 기쁨. 그것이 조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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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뒷담화는 기쁨을 준다. 조롱하는 뒷담화는 더욱 그렇다. 경멸의 대상이 증오의 대상 안에 있다고 상상하기에 기쁘다. 경멸의 대상을 상상 속에서 마음껏 파괴하고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될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에는 두 가지 기쁨이 있다. 마음껏 추구해도 계속 기쁨인 기쁨과 마음껏 추구하면 어느 순간에 슬픔이 되는 기쁨. 조롱이라는 기쁨은 후자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우리들이 증오하는 이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우리들이 표상하는 것에서 생기는 기쁨은 어떤 슬픈 감정을 동반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47)


직장 상사를 증오한다고 해보자. 그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상상할 때 기쁘다. 하지만 그때 묘한 슬픔도 있다. 그건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해본 사람은 안다. 그 증오의 대상을 쉽게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를 죽일 만큼 증오하면 그를 죽여 버리면 온통 기쁨을 느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증오의 대상이 죽으면, 즉 사라지면 그에게 해악을 가하면서 느낄 나의 기쁨 역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직장 상사를 증오하더라도 그가 파멸되거나 다른 악을 입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 기쁨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슬픔도 있다. 내가 누릴 기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슬픔. 조롱하는 뒷담화 역시 마찬가지다. 조롱과 뒷담화는 기쁨을 주지만 그 기쁨을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슬픔에 빠지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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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더 큰 슬픔이 되는 조롱


“한 사람이 (누군가를)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쁨은 지속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팀장, 그 새끼를 여자 친구보다 좋아하는 것 같아” 눈만 뜨면 팀장 뒷담화를 했던 동료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이다. 그는 팀장을 경멸했다. 그래서 조롱했다. 기쁨을 누렸다. 그 기쁨에 취해 시도 때도 없이 팀장 뒷담화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사랑하는 그래서 기쁨을 주는 여자 친구 생각보다 증오하는 그래서 슬픔을 주는 팀장 생각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을. 정말 그랬다. 그는 하루 종일 온통 팀장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조롱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야 했으니까.


조롱은 기쁨이지만 지속성이 없다. 더 나아가 조롱의 기쁨은 어느 순간 슬픔으로 되돌아온다. “조롱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롱(기쁨)을 느끼려면 반드시 증오(슬픔)하는 대상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래서 과도하게 한 사람을 조롱하면 증오의 대상을 떠올리느라 슬픔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팀장을 조롱하느라, 정작 여자 친구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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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를 멈추는 방법


조롱의 뒷담화는 잠시의 기쁨 뒤에 더 큰 슬픔을 준다. 하지만 쉽사리 멈출 수 없다. 어찌 해야 할까? 조롱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조롱은 경멸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경멸의 대상이 나타났을 때 조롱하고 싶은 욕구가 나타난다. 즉, 조롱을 멈추고 싶다면 경멸의 감정을 멈추면 된다. 경멸이 사라졌을 때 조롱 역시 사라지게 된다. 이제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어떻게 경멸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7)


스피노자는 감정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반대되는 다른 감정에 의해서 억제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사랑과 증오를 생각해보면 된다. 예컨대,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억제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증오의 반대 감정인, 사랑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된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 미워하는 마음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경멸’의 반대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경탄’(놀라움)이다.


경탄(놀라움)이란 어떤 사물에 관한 표상이다. 이 특수한 표상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 안에 확고히 머무른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우리는 언제 경탄(놀라움)에 빠질까? 나는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첫 사랑을 만났을 때 경탄에 빠졌다. 어떤 사물(바다, 그녀)을 만났고, 그에 관한 표상(이미지)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이전에 다른 이미지와 아무런 연결이 없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 이미지는 내 마음에 확고히 머무르게 되었다. 바다와 첫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경탄(놀라움)에 빠졌다. 경탄은 경멸과 반대된다. 원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경멸(돈벌레)은 원 밖(음악, 소설)에 시선을 두는 것이고, 경탄(첫사랑)은 원 안(하얀 피부, 긴 머리)에서 시선을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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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탄의 대상을 찾아 나서기


경멸은 경탄으로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우리는 어떻게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를 경멸하지 말아야 하지!”라고 다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오직 경탄의 대상을 찾았을 때만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떼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많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찾았을 때, 경멸은 억제되거나 사라진다. 경멸이 사라지면 누군가를 조롱하는 뒷담화를 할 일은 애초에 없다. 조롱은 경멸로부터 시작되니까.


이제 왜 냉소적인 사람들이 더 자주 조롱을 일삼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냉소적인 이들은 어떤 것에도 크게 감동받지 않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놀라운 대상들 앞에서도 경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주 경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더 자주 조롱하는 뒷담화에 휩쓸린다. 조롱을 일삼는 냉소적인 이들은 어리석다. 작은 기쁨을 누리려다 큰 슬픔에 빠져버리는 까닭이다.


조롱의 뒷담화를 멈추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경탄의 대상을 찾으면 된다. 음악, 미술, 소설, 영화, 책, 사람, 사랑, 수업, 여행 등등 우리를 크게 감동시킬 만한 것들을 많다. 그것을 하나씩 찾아가면 된다. 큰 감동을 받아 터져 나오는 웃음과 눈물. 그 경탄의 웃음과 눈물이 경멸의 대상을 사라지게 한다. 왜 안 그럴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와 음악, 놀라 입이 벌어질 여행과 사람과 마주할 때, 돈벌레나 꼰대 같은 경멸의 대상은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롱과 뒷담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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