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후회'
후회의 집요함
“그때 그 대학에 갔어야 했는데.” “책을 좀 많이 읽을 걸” “그때 연애를 하지 않았어야 했어” “그때 사업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때 집을 사놨어야 했는데” 우리는 갖가지 후회를 하며 산다. 후회만큼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감정도 없다. 건강한 삶은 ‘지금’을 사는 삶이다. 하지만 후회는 퇴행적이다. 자꾸만 ‘과거’에 머무르게 한다. 후회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과거에 얽매여 지금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후회는 그렇게 조금씩 우리네 삶을 피폐하게 한다.
이런 후회는 대체로 언제하게 될까?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슬픔)다. 승진에 누락되고, 결혼이 파토 나고, 월세와 전세를 전전해야 하고, 사업이 어려워질 때다. 현재가 슬픔일 때, “그때 그걸 하지 말았어야(혹은 했었어야) 했는데” 라며 지난 과거의 선택들이 후회된다. 이런 후회 역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납득은 된다. 죽은 아이 부랄 만지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심정 아니겠는가.
이 후회라는 감정은 집요하다. 현재가 만족스러울 때(기쁨)조차 후회라는 감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꽤 많은 돈을 벌게 될 때, 삶을 바꿀 지혜나 지식을 얻을 때가 있다. 현재가 기쁨일 때다. 하지만 그때조차 “아, 이걸 조금 더 일찍 벌었어야(알았어야) 했는데” 라며 후회한다. 후회는 필연적으로 이중으로 우리를 슬픔을 밀어 넣는다. 삶이 슬플 때(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후회하느라 더 큰 슬픔에 빠지고, 삶이 기쁠 때(만족스러울 때)도 후회하느라 기쁨을 잊고 슬픔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후회는 필연적이고 이중으로 슬픔에 빠뜨린다.
후회만큼 우리네 삶을 우울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감정도 없다. 유쾌하고 명랑한 삶을 원한다면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후회라는 감정의 가장 큰 문제 역시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야지’ 마음먹는다고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다. 후회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시에 우리를 덮쳐오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후회가 밀려 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피노자의 ‘후회’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7)
스피노자에게 ‘후회’는 ‘슬픔’이다. 우리를 쪼그라들게 하는 슬픔. 그렇다면, 후회는 어떤 종류의 슬픔일까? 우리의 정신이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을 때 발생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난해하다. 그 이유는, ‘자유로운 결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후회’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러한 의견은 단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는데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유 관념은 단지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에티카, 제 2부, 정리35, 주석)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되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이런 주장은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자유롭게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옳다. ‘성규’과 ‘혜주’이 있다. ‘성규’은 여행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다. 혜주는 취업을 포기하고 여행을 다니는 삶을 선택했다.
스피노자의 ‘자유’
둘 모두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성규’는 왜 여행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돈을 없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비참함까지 느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또 사업이나 장사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불안정해서 언제 다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삶임을 알고 있다. ‘혜주’는 왜 취업을 포기하고 여행을 다니는 삶을 선택했을까? 프랑스에 사는 이모 때문이다. 우연히 놀러간 프랑스에서 돈보다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모 댁에서 지내면서 취업 말고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규’와 ‘혜주’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다. 성규는 자신이 직장인이 되려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아버지의 부도, 가난, 경제적 불안정)은 모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자유롭게 취업을 준비한다고 믿는 이유다. 혜주도 마찬가지다. 혜주는 여행을 떠나려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게끔 결정하는 원인”(이모, 프랑스, 프랑스에 만난 사람들) 모르고 있다. 그런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 자유롭게 한 선택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규’와 ‘혜주’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무지다.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 둘의 자유 관념은 “단지 자신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제 ‘후회’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후회’라는 감정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후회의 원인, 과잉된 자의식
후회란 원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며 (중략) 이러한 감정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1, 주석)
후회는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한 어떤 행동이 안 좋은 결과의 원인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슬픔이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후회’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원인’으로서의 나 자신이 떠오를 때의 ‘슬픔’ 아닌가.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슬픔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후회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니다. 분명 더 크게 더 자주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과잉된 자의식이다.
과잉된 자의식이 뭔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믿는 상태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다. 타자와 세상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머릿속에 온통 자신의 생각만 가득한 상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생각하고 느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들에게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또한 이들은 타자와 세상의 문제를 모두 ‘나’의 문제로 부지불식간에 연결 짓는다. 이들은 여럿이서 함께 한 일이 잘되면 다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 수군거리면 자신의 욕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하다. 세상의 중심은 나니까.
이런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크게 더욱 자주 후회할 수밖에 없다.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이들은 자신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항상 후회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현재 상황이 만족스러울 때든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후회하며 산다. 돈이 없을 때면, “그때 직장을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한다.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될 때면, “좀 더 일찍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한다. 그는 왜 이렇게 크게 또 자주 후회하는 걸까?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과도하게 “자기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그 과잉된 자의식이 후회의 진짜 원인이다.
자유라는 환상이 남긴 슬픔, 후회
후회는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는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하여 행하였다고 믿는”에 있다. 정신의 자유로운 결심이 정말 가능할까? 그것이 온전히 가능하다면 그건 신의 전지전능함일 테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결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기 마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부모를 만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랑하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나쁘다고 불리는 행위를 비난하고, 그런 행위 때문에 자녀들을 자주 꾸짖음으로써, 또 반대로 올바르다고 불리는 행위를 권하고 칭찬함으로써, 슬픔의 감정이 전자와 기쁨의 감정이 후자와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중략) 각자는 교육받은 것에 따라 어떤 행위에 대해 후회하기도 하고 또 자랑하기도 한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27, 해명)
우리의 정신은 온전히 자유로운 결심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조건(부모, 교육)에 따라 어떤 행위에 대해 후회하기도 하고 또 자랑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후회라는 감정의 놀라운 진실을 하나 알게 된다. 후회는 위축의 감정이 아니라 오만의 감정이다.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혹은 과잉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후회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처한 현재 상황의 원인을 모두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 아닌가. 과도하게 후회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했다고 믿는다. 즉, 자신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다. 그래서 과도하게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후회를 다루는 법
“후회가 밀려 들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 답할 수 있다. 과잉된 자의식에서 벗어나면 후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며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때 보인다. 지금 내 삶이 슬픔에 빠진 것은 오롯이 나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때문이 아니었음을. 지금 나의 슬픔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내몰린 결과였음을 깨닫게 된다. 후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회는 내가 자유로웠던 만큼 하면 된다. 내가 자유롭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후회의 대상이 아니다.
직장인이었던 시절, 취업한 것을 지독히도 후회했다. “일찍 해외로 나갔어야 했어.” “좀 더 일찍 사업을 준비했어야 했어.” 당연했다. 직장은 내게 가장 큰 슬픔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취업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취업을 당한 거였다.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해야 나가야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취업을 하게 될 테다. 아니 할 수밖에 없을 테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조건과 상황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의 내 선택들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노파심에서 할 말이 있다. 과잉된 자의식을 벗어난다고 해서 지금의 불행한 현실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다. 후회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슬픔이 닥쳐왔을 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부분만 후회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과도한 후회는 언제나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니까. 그렇게 후회라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점차 불행이 걷힌다. 후회를 잘 다루는 이는 과거의 묶인 삶에서 벗어나 눈앞에 닥친 지금의 삶을 강건하게 살아낼 준비를 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