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반감'과 '증오'
꼴 보기 싫은 인간들
“저 새끼 진짜 짜증나지 않냐?”
“왜 쟤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꼴 보기 싫어.”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꼴 보기 싫은 이유가 있는 인간들이 있다. 선생, 팀장, 선배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각종 슬픔(분노, 공포, 위축감, 치욕 등)을 준다. 우리는 이들이 싫다. 아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슬픔을 주는 인간들을 멀리하고 기쁨을 주는 인간들을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다. 그러니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인간들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슬픔을 주는 인간들을 싫어해야 그들을 멀리 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증오, 반감, 멸시, 경멸)도 슬픔이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할 때 자신이 얼마나 쪼그라드는지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슬픔(증오, 반감, 멸시, 경멸)이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을 향할 때는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기쁨이 된다.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을 싫어함으로써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슬픔을 최소화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꼴 보기 싫은 이유가 있는 이들을 향한 싫어하는 마음은 일종의 건강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유 없이 싫다’는 자기 파괴적인 마음.
문제는 두 번째 부류다. 그냥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다. 이유가 없다. 그냥 싫다. 많은 이들이 이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을 때 그냥 싫어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혹은 명백한 슬픔(분노, 공포, 위축감, 치욕)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 중에 이유 없이 싫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들을 싫어하는 마음(증오, 반감, 멸시, 경멸)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슬픔을 최대화한다는 의미다. ‘싫어할 이유가 있는(슬픔을 주는)이’들을 싫어하는 건 슬픔을 최소화하려는 지혜로움이다. 하지만 ‘싫어할 이유가 없는(슬픔을 주지 않는, 어쩌면 기쁨을 줄 수도 있는)이’들을 싫어하는 건 슬픔을 최대화하는 어리석음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이 큰 사람들이 결국 혼자 남겨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슬픔이 가득 찬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이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러니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가 꼴 보기 싫어진다면, 너무 늦지 않게 물어야 한다. “왜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질까요?”
스피노자의 ‘반감’
“왜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질까요?” 스피노자에게 묻는다면 이리 답해줄 테다. “그것은 ‘반감’ 때문이라네.”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반감aversio이란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9)
“아, 그 책은 반감이 들던데” 어느 책을 읽고 반감이 들었다고 해보자. 그 말은 슬픔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어떤 슬픔일까? 어제 읽은 책(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을 생각(관념)할 때 우연히 찾아온 슬픔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연히’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히’는 내가 그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책이 내 마음에서 ‘반감’이라는 감정을 일으킨 것이 ‘우연’이라는 말이다. 스피노자는 이 ‘우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해서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에티카, 제3부, 정리 15)
스피노자는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해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다른 책들은 내게 전혀 ‘반감’을 주지 않았는데, 그 유독 그 책만 내게 ‘반감’을 주었다. 즉, 이 말은 그 책이 내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내면적 상태가 ‘우연히’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그 책에 반감을 느끼게 되는 내면적 상태는 어떤 ‘우연’에 의해서 발생된 것일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반감, 우연한 사건의 결과
우리는 어떤 것을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을 가지고 고찰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것 자체가 그러한 감정의 작용원인이 아닌데도 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5, 계)
야구 배트가 있다. ‘민준’은 야구배트에서 사랑의 감정을, ‘성식’은 증오의 감정을 느낀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야구 배트 자체는 각자의 감정(사랑, 증오)을 불러일으킬 작용원인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민준’과 ‘성식’은 야구 배트를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왜 그럴까? ‘민준’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야구놀이를 하며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고, ‘성식’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야구 배트로 맞으면서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어떤 것(야구배트)을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을 가지고 고찰(기억)했다는 것만으로, 그 어떤 것 자체가 그러한 감정의 작용원인이 아닌데도 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반감’의 메커니즘이다. 과거 슬픔을 주었던 어떤 기억이 지금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다. “왜 이유 없이 누군가 싫어질까요?”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반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직장을 다닐 때 이유 없이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싫어할 이유가 없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그냥 꼴 보기 싫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들이 싫었던 이유가 정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김 대리는 책임감 있고,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박 과장은 능력이 있고, 성실했지만 책임감이 없었다. 문 부장은 책임감, 능력, 성실함을 다 갖췄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그래서 나는 그네들이 싫었던 게다. 하지만 나는 왜 그들이 싫은 이유를 알지 못했을까?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아주 은밀할 뿐이다. 나는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 꼴 보기 싫었다. 싫은 이유가 은밀할 때 우리는 그냥 싫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반감이라는 감정이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은 그저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유 없이 싫은 이들은 끊임없이 대체되었다. 그네들보다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이 이유 없이 싫어졌다.
반감의 기원을 찾아서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반감의 기원은 어디인가?’ 즉, 반감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반감’의 기원은 ‘증오’라는 감정이다. 달리 말해, ‘반감’은 ‘증오’라는 감정에 의해 형성된다. ‘반감’이라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증오’라는 감정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 스피노자는 ‘증오’라는 감정을 이렇게 정의한다.
“증오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7)
반감과 증오는 모두 슬픔이다. 하지만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반감이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된 어떤 사물”로 인해 발생한 슬픔이라면, 증오는 “외적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슬픔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적 원인”은 대체 불가능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반감’의 대상은 우연적(대체 가능)지만, ‘증오’의 대상은 필연적(대체 불가능)이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은 반감의 대상들이었다. 그래서 반감의 대상은 우연적이었고 대체 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게 ‘증오’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통해 절절하게 깨달았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남자가, 자존심만 남았다면, 그 남자의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지. 아버지는 내게 슬픔을 주는 ‘외적 원인’이었다. 필연적이었으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으니까. 그렇게 아버지는 꽤 긴 시간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제 ‘반감’이 ‘증오’에 의해 형성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
반감은 우연히 만들어진 슬픔의 원인으로부터 온다. 내게 그 원인은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었다. 그 원인의 기원은 어디였을까? 아버지였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불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를 ‘증오’했다.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싫었던 게다. 하지만 그네들은 분명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그네들이 이유 없이 싫어진 거였다. 다른 반감도 마찬가지다.
‘희연’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옆 팀 팀장을 이유 없이 싫어한다. 팀도 다르고, 심지어 그 팀장은 그녀를 잘 챙겨주기까지 한다. 그러니 그녀가 그 팀장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팀장이 꼴 보기 싫다고 했다. 그녀가 그 팀장이 싫은 은밀한 이유는 ‘자상한 간섭’ 때문이었다. 그 팀장은 팀원들에게 자상하게 꼼꼼하게 업무지시를 했다. 정작 옆 팀 팀원들은 팀장을 좋아했지만, 희연은 그것에 반감에 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자상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간섭했다. “양치질은 했니? 밥 먹기 전에 물 먹는 거 아니야. 티비보지 말고 숙제부터 해야지.” 희연은 자상한 목소리도 끊임없이 간섭하는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 증오의 감정 때문에 자상한 간섭을 하는(혹은 그렇게 보이는) 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반감’ 즉, 이유 없이 누군가 꼴 보기 싫다면, 그 이면에는 ‘증오’의 감정이 있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인 셈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지 않는 법
1.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기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제 답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증오’의 대상을 떠내보면 된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 아닌가. 그러니 증오를 떠나보내면 반감은 애초에 생길 수 없다. 이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제 세상의 수많은 ‘김 대리’ ‘박 과장’ ‘문 부장’에게 아무런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김 대리’ ‘박 과장’ ‘문 무장’도 반감을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불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한 남자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 남자 역시 무겁고 고된 삶을 잘 살아보려 무던히 애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아버지를 한 남자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증오의 대상 하나를 떠나보냈다. 이제 무책임·무능력·불성실·자존심이라는 그릇에 누가 담기더라도 그 사람에게 반감을 갖지 않게 된 이유다. 증오의 대상을 하나 떠나보내며 반감이라는 찌꺼기 역시 떠나 보내버렸다.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기’ 이것이 가장 확실히 반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사람마다 증오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버지를 극심하게 증오하는 이는 증오를 떠나보내기 쉽지 않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반감 역시 긴 시간 극복하지 못하거나 혹은 영원히 극복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이 있다.
2.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기
‘희연’은 여전히 어머니를 증오한다. 하지만 더 이상 옆 팀장에게 반감을 갖지 않는다. 즉, 증오의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고도 반감을 극복한 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희연과 나눈 대화에 그 답이 있다.
“선생님, 저는 왜 옆 팀장이 이유 없이 싫을까요?”
“팀장을 안보고, 거기서 엄마를 보니까 그렇지.”
“아.... 그렇구나.”
반감은 일종의 환영이다. 어떤 대상에서 증오의 대상이 겹쳐 보이는 환영. 옆 팀장에 대한 희연의 반감은 환영이다. 그 팀장에게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환영. 이 환영을 제거하면 반감은 사라진다. 어떻게 이 환영을 제거할 수 있을까? ‘반감은 증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자체로 가능하다. 달리 말해, 자신의 반감이 ‘자상한 간섭’(엄마)에 대한 증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팀장에게 겹쳐진 엄마의 잔상이 사라진다. 그렇게 반감이라는 환영이 제거된다. 그제 서야 있는 그대로의 팀장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 경멸이든 호감이든, 그 팀장에 대한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반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증오 대상을 떠나보내기. 그것이 어렵다면, 반감은 증오의 찌꺼기라는 사실을 깨닫기.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