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중독'
중독의 시대
“하루에 유튜브를 8시간씩 봐요.” “하루 종일 게임 생각뿐이에요.” “하루라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안올리면 불안해요” “쇼핑을 하다 카드 한도를 초과해버렸어요.”
우리는 중독의 시대를 산다. 대상의 차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엇인가 중독되어 있다. 중독은 무엇일까? 특정한 대상이 늘 머릿속에 맴돌고, 그 대상을 탐닉할 때만 만족을 느끼는 상태다. 술·도박·게임·섹스·SNS·쇼핑 중독이 그렇지 않은가. 그것에 중독된 이들은 술·도박·게임·섹스·SNS·쇼핑이 늘 머릿속에 맴돈다. 또 술·도박·게임·섹스·SNS·쇼핑을 탐닉할 때만 쾌감 혹은 안정감 같은 모종의 만족감을 느낀다.
중독된 삶은 필연적으로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건강한 삶은 세상의 다양한 사람, 사물, 사건들을 경험할 때 가능하다.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신체가 건강하듯, 우리의 정신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경험해야 건강하다. 하지만 중독은 필연적으로 경험적 편식의 삶으로 나아간다. 세상을 탐닉의 대상과 탐닉의 대상 아닌 것으로 구분해버리는 까닭이다.
탐닉 어느 시점을 지나면 급기야, 탐닉의 대상이 이외의 것들은 의식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세상이 도박, 게임, 쇼핑으로만 보이게 된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심각한 중독자들이다. 중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질문 중요하다.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기쁨’은 항상 좋은 것일까?
먼저 중독이 왜 생기는지부터 알아보자. 스피노자는 중독의 원인을 ‘기쁨’에서 찾을 테다. 기쁨이 무엇인가?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크게 해주는 감정이다. 의아하다. 중독은 삶을 파괴하는 갖가지 ‘슬픔’의 감정으로 우리를 몰아넣지 않는가. 그런데 왜 ‘기쁨’의 감정이 왜 중독의 원인이란 말인가. 의아함을 해소하기 위해, ‘기쁨’이라는 감정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기쁨’을 쫓는 존재다. 모든 인간은 저 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활력을 크게 하려고 애쓰는 존재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 ‘기쁨’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항상 ‘기쁨’을 줄 것 같은 대상을 더 자주 떠올리려고 한다. 삶의 활력을 크게 해서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표상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2)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하는 대상을 가능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정신은 직장 상사보다 연인 생각을 가능한 한 더 상상(표상)하려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연인을 생각할 때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대되거나 촉진되기 때문이다. 즉, 그때 기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정신은 이렇게 늘 기쁨의 대상을 더 많이 떠올리려고 한다.
그런데, 이 ‘기쁨’이라는 감정이 항상 좋은 것일까? 복잡한 미묘한 인간의 감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때로 ‘기쁨’은 삶의 활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기쁨을 쫓는 인간의 정신은 우리를 슬픔으로 몰고 간다. 이 역설에서 기쁨이 중독의 원인이 되는 의아함을 설명할 수 있다. 기쁨을 쫓다 그 끝에 슬픔에 빠지게 되는 특정한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그 특정한 상황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외적 충격을 받은 상황이다.
왜 중독되는가?
나는 한 동안 알콜 중독이었다. 늘 술 생각을 했고 술을 마실 때만 쾌감과 안정감 같은 모종의 만족을 느꼈다. 그런 내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할 때는 언제였을까?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박차고 나온 지 1년 즈음 될 때였다. 그 시절은 걱정, 불안, 공포가 연속인 상황이었다.
작가가 되겠다고 호기롭게 직장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뭐 하나 내 맘처럼 되는 일이 없었다. 생각만큼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계획했던 일들은 다 어그러져버렸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이 될까봐 걱정되었고,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이 점차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매일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할 때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술을 한 잔씩 털어 넣을 때마다 다시 직장을 뛰쳐나올 때의 호기로운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 공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술이 깨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 걱정, 불안, 공포에 휩싸일까봐. 그래서 늘 술 생각만 났다. 술이 깨기 전에 다시 술을 마셔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술에 중독되었다. 알콜 중독은 술 때문에 발생한 사달이 아니었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외적 상황 때문이었다. 그렇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외적 충격을 받는 상황. 이것이 중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이제 왜 ‘기쁨’이 중독의 원인지도 알 수 있다.
중독은 ‘기쁨’을 쫓는 처연한 발버둥.
술에 빠져 있던 시절, 나는 왜 하루 종일 술 생각을 했을까?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까? 달리 말해, 슬픔에 빠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술을 마시면 잠시지만 자신감과 용기가 생기가 생겨 기뻤다. 그래서 걱정, 불안,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내 정신은 쉬지 않고 자꾸만 술 생각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외적 상황 아래서, 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고 촉진하는 사물이었으니까. 일단 어떤 대상에 중독되면 다른 대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사물을 표상할 때, 그러한 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마음에 떠올리려고 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3)
“책을 읽던지 영화를 보던지 다른 일을 해봐” 술에 빠져 있을 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다. 술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술 이외의 것들은 나의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사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것(책, 영화)의 존재를 배제하는”하는 쪽으로 정신이 움직였다. 나는 기쁨을 위해서 술에 집착했고, 술 이외 것들을 애써 외면했다. 오직 술만이 기쁨을 주었고, 술 이외의 것들은 슬픔을 주었으니까. 기쁨을 쫒으려던 마음이 치명적인 슬픔(중독)을 가져왔다. 결국, 기쁨이 나를 중독으로 이끈 셈이다.
누가 중독을 어리석다고 하는가. 중독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다. 처연한 발버둥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안에서 실낱같은 기쁨이라도 쫓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처연한 발버둥. 쇼핑, SNS, 유튜브, 게임, 일, 운동 등 다른 중독도 모두 마찬가지다. 중독된 이들은 먼저 모두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각자의 외적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상황에서, 기쁨을 찾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독은 중독 아니던가. 중독이라는 발버둥은 잠시의 기쁨 뒤에 더 큰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발버둥이다. 그래서 처연한 발버둥이다. 그래서 중독을 그저 내버려둘 수가 없다. 이 중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스피노자의 ‘중독’
먼저 스피노자가 중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탐식, 음주욕, 색욕, 탐욕 및 야심이며, 이것들은 사랑이나 욕망에 속하는 감정의 본성을 관련된 대상에 의해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식욕, 음주욕, 정욕, 탐욕 및 야심을 음식, 음주, 성교, 부 및 명예에 대한 과도한 사랑 또는 욕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6, 주석)
스피노자에게 탐식, 음주욕, 색욕, 탐욕, 야심은 중독이다. 탐식에 빠진 사람은 늘 먹는 것만 생각하고, 먹을 때 쾌감이나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음주욕, 색욕, 탐욕에 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늘 술, 성교, 돈 생각만 하고,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돈을 벌 때만 쾌감이나 안정감을 느낀다. 야심 역시 일종의 중독이다. 야심에 빠진 사람은 항상 명예만 생각하고, 명예를 얻었다고 여길 때만 쾌감과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탐식, 음주욕, 색욕, 탐욕, 야심 같은 중독의 작동원리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그 모든 중독들은 “음식, 음주, 성교, 부 및 명예에 대한 과도한 사랑 또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중독은 사랑의 결과다. 사랑이 무엇인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중독은 기쁨을 쫓은 결과다. 그런데 여기서 ‘과도한’이란 형용사에 주목해야 한다. 중독은 분명 사랑의 결과이지만 ‘과도한’ 사랑의 결과다.
음식, 술, 성교, 부, 명예는 기쁨을 준다. 그것들이 기쁨을 주기에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고 욕망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것은 스피노자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마찬가지다. 기쁨을 쫓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니 아무 문제도 없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성교를 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은 기쁨을 쫒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과도해졌을 때 문제가 된다. 사랑과 욕망이 과도해졌을 때 중독이 탄생하게 된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간명하다. 기쁨을 주는 대상을 향한 사랑과 욕망이 과도해지는 것을 막으면 된다. 중독은 기쁨을 쫓다 슬픔에 빠져버리는 상태 아닌가. 그러니 기쁨이 슬픔으로 변질되지 않을 만큼만 그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인간은 기쁨을 무작정, 무제한으로 쫒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과 욕망이 과도해져서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파악
먼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사랑’과 ‘명예’를 예로 들어보자. 이 두 가지 감정은 기쁨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은 과도하게 추구해도 슬픔으로 전환되지 않는 기쁨이지만, ‘명예’는 과도해지면 슬픔으로 전환되는 기쁨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명예’ 모두를 과도하게 추구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명예는 문제가 된다. 기쁨을 얻으려 명예를 과도하게 쫒다가 슬픔을 주는 야심 빠져버리게 된다. ‘야심’이라는 중독은 그렇게 탄생한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이 의도하는 바인 감정의 힘, 그리고 감정에 대한 정신의 능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감정에 대한 일반적 정의만으로 충분하다. 감정을 제어하고 억압하는 정신의 능력이 어떤 성질이며 얼마나 큰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정신의 공통된 특질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6, 주석)
스피노자는 중독된 감정(탐식, 음주욕, 색욕, 탐욕, 야심)을 제어하는 정신의 능력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다양한 각각의 감정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는 사람은 그만큼 중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은 과도하게 쫒지만, 명예는 과도하게 쫒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반대로 감정의 정의를 섬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무엇인가에 너무 쉽게 중독될 수 있다. 기쁨을 주는 다양한 감정들을 무작정, 무제한으로 쫓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보편적인 감정의 정의를 잘 파악한다고 해서 중독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탐식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밥 한 그릇에서 포만감(기쁨)을 느끼고 그보다 많이 먹게 되면 불쾌감(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이는 세 그릇 정도는 먹어야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즉 사람마다 기쁨의 대상이 중독의 대상으로 변화되는 지점이 다르다.
‘나’의 단독적인 감정의 파악
두 번째 방법이 필요하다. 보편적 감정의 정의만큼이나 단독적인(개별적인) 감정도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은 ‘신체적-정신적’이다. 그러니 단독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잘 파악한다는 것은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를 섬세하게 살핀다는 것을 말한다. 게임은 즐거움(기쁨)을 준다. 하지만 게임을 오래 하다보면 머리가 띵하고 눈이 아픈 불편함(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게임 중독은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파악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제 중독에 관한 오해를 하나 풀 수 있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게임·도박·쇼핑 중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게임, 도박, 쇼핑을 완전히 끊는 게 아니다. 그것들을 끊게 하려고 할 때 중독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조르주 바타유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강력한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에로티즘의 역사) 금지는 더욱 욕망하게 해서 중독을 강화할 뿐이다. 놀랍게도, 게임, 도박, 쇼핑을 하는 것이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알콜 중독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술을 마신다. 아니 술을 마시기에 알콜 중독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이제 안다. 술이 어디까지 기쁨을 주고 어디서부터 슬픔을 주는지. 그래서 기쁨을 줄 때까지 술을 마실 수 있다. 술을 자유롭게 마시게 되었을 때 알콜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중독은 감정의 일부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첫째,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의 정의를 잘 파악할 것. 기쁨이 과도해져서 슬픔이 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둘째, ‘나’(단독적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필 것. ‘나’의 정신과 신체에서 기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달리 말해,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