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넌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하냐?” 집, 학교, 직장 등 어떤 공동체를 가더라도 피할 수 없었던 핀잔이다. 엄밀히 말해, 이 핀잔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너는 왜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느냐?’는 의미다. 희생이 무엇인가? 어떤 목적(혹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명백히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다.
‘공부하라’ ‘군대 가라’ ‘취업하라’ ‘효도하라’ 이런 말들은 모두 희생의 강요다. 어떤 목적(미래, 국가 안보, 돈, 부모)을 위해 각자가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게임, 젊음, 자유, 정체성)들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공부하기 싫어! 군대 가기 싫어! 취업하기 싫어! 효도하기 싫어!’ 라며 희생의 강요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하냐?” 이 경멸 섞인 핀잔은 바로 이들을 향한다. 그렇게 희생은 당연한 것을 너머 훌륭한 것이 된다.
하지만 희생하며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희생하는 삶이 얼마나 불쾌하고 우울하고 절망스러운지. 공부·입대·취업·효도하는 희생의 삶. 이런 삶은 우리를 점점 더 불행의 나락으로 내몬다. 하지만 희생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네 삶의 선택지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왜 안 그럴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희생은 당연한 것이며 더 나아가 훌륭한 것이니까.
희생의 가장 큰 문제는 희생하는 삶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와 희생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 이것이 희생의 진짜 문제다.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희생하지 않아도 될까요?”
스피노자의 ‘희생’
스피노자는 ‘희생’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한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사유체계를 촘촘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희생’에 관한 스피노자의 관점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 추론을 가능케 할 대목을 먼저 들여다보자.
정신은 자기의 능력이나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하는 사물을 표상할 때, 그러한 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마음에 떠올리려고 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13)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자연스레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쁨으로 다가서려는 존재다. 그러니 인간의 정신은 자기의 능력이나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억제하는 사물을 생각할 때, 그 사물을 없애는 사물을 가능한 마음에 떠올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게임 그만하고 빨리 공부 해!” 엄마가 말했다. 그때 그 아이는 엄마의 직장을 떠올린다. 엄마가 빨리 직장으로 가기(존재의 배제)를 마음속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의 말이 아이의 신체의 활동능력을 감소·억제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스피노자가 ‘희생’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희생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다. 희생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희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자연스럽다. 희생은 기쁨에서 멀어지고 슬픔으로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윤리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은 자연스럽게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는 왜 엄마가 직장에 가기를 마음속으로 떠올렸을까? 게임(기쁨)을 못하게 하고 공부(슬픔)를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엄마는 아이에게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신체활동능력을 감소·억제하는 사물(공부, 군대, 취업, 효도)을 배제하는 쪽으로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공부·군대·취업·효도를 생각할 때 온 몸에 힘이 빠지지(신체활동능력이 감소·억제) 않던가. 그러니 우리의 정신은 희생을 거부하는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희생하는 삶은 불쾌하고 우울하다. 그런 삶은 기쁨에서 멀어지고 슬픔에 가까워지니까. 그래서 점점 신체의 활동능력이 감소·억제된다. 희생하지 않는 삶은 유쾌하고 명랑하다. 그래서 점점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대·증폭된다.
희생이 남기는 상흔들
희생하지 않는 삶은 자연스러운 삶이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반드시 문제가 된다. 즉, 희생하는 삶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부모의 겁박으로 공부(희생)하는 아이는 어떻게 될까? 가장 먼저 그 공부(희생)을 하는 동안에 ‘우울’하다. 그것은 그 아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 게임하고 싶은데 왜 공부해야 하지” 그런 희생이 지속될 때 ‘분노’와 ‘원망’이 쌓인다. 인간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때 분노와 원망이 쌓일 수밖에 없다. “아, 씨, 왜 매일 공부해야 되는 거야! 공부하라는 인간들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뿐인가? 희생으로 쌓인 우울, 분노, 원망이 뒤엉켜 시간이 지나면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이 된다. “공부 안하는 인간들은 다 죽어야 돼!” 긴 시간 희생하며 공부한 아이의 내면은 흉측하게 뒤틀리게 마련이다. 긴 시간 희생하며 살았던 이들은 희생하지 않는 이들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희생이 남긴 ‘피해의식’ 때문이다. 이처럼 희생은 다양한 슬픔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유쾌하고 명랑한 삶을 원한다면, 주어진 삶의 최대한의 범위 내에서 강건하게 희생을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
“희생하지 않아도 될까요?” 스피노자에게 묻는다면 이리 답해줄 테다. “희생하지 말거라. 희생하는 삶은 우울하고 불쾌해서 한 없이 슬픈 삶이다.” 하지만 의아하다. 하지만 때로 내 것으로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유쾌하고 명랑해지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가. 기쁜 마음으로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어떤 이들의 ‘희생’은 전혀 슬픔의 정서로 느껴지지 않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헌신’
자기가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어놓으면서도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하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은 어떻게 다른가? ‘자기가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어놓음’ 이라는 측면에서는 둘은 같다. 하지만 ‘희생’과 ‘헌신’은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희생’은 슬픔을 가져오고, ‘헌신’은 기쁨을 가져온다. 스피노자는 ‘헌신’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들어보자.
헌신이란 우리가 경탄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헌신’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어놓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 ‘헌신’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랑인가? ‘경탄’하는 이에 대한 ‘사랑’ 도식화하자면, ‘헌신=경탄+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신입사원이 있다. 그는 팀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이틀이 멀다하고 야근을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기쁨이 샘솟는다. 그는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는 다른 직원이었다면 짜증과 불만(슬픔)이 터져 나왔을 ‘희생’이었을 테다. 그런데 왜 그 신입사원에게는 ‘헌신’이었을까?
팀장 때문이었다. 그 신입사원은 팀장을 ‘사랑’했다. 여기서 ‘사랑’은 스피노자의 ‘사랑’(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신입사원은 팀장(외적원인)을 생각하면 기뻤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굳은 일과 야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는 없다. 신입사원은 팀장을 보며 ‘경탄’했다. ‘경탄’이 무엇인가? “다른 표상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에 정신은 그 표상에 확고히 머무르는” 감정이다. 그 신입사원은 팀장만큼, 총명하고 동시에 근면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팀장을 보며 ‘경탄’했다. ‘경탄’하는 이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그는 ‘헌신’할 수 있었던 게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총명, 근면 등에 대해 경탄하는 경우, 우리의 사랑은 그것에 의하여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경탄 또는 존경과 결합된 이 사랑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부른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2, 주석)
신입사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팀장)의 총명과 근면에 경탄했다. 그 경탄 또는 존경과 결합한 사랑이 바로 헌신이다. 이것이 그 신입사원이 굳은 일을 도맡아하고, 야근을 하면서도 기쁨이 샘솟는 ‘헌신’이 가능했던 이유다. 나 역시 ‘헌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내가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주말에 극장에 가거나 차분한 저녁 시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수시로 깨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재우느라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니었다. ‘헌신’이었다. 많은 것들을 내어놓아야 했지만 기뻤다. 그 이유를 이제 알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경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작은 입으로 젖꼭지를 오물오물 빠는 것.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꼬물꼬물 거리는 것. 처음으로 뒤집기를 하던 것.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던 것. 그 모든 순간은 내게 ‘경탄’이었다. 그 ‘경탄’의 대상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헌신’할 수 있었다. 육아는 ‘경탄’과 ‘사랑’이 없다면 결코 기쁨이 될 수 없다. 육아는 너무 많은 것들을 내어놓아야 하는 일인 까닭이다.
희생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희생하지 않아도 될까요?” 답은 간명하다. “그렇다. 희생하는 삶은 슬픔이 가득한 삶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희생하는 삶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방법. 그리고 헌신하는 방법.
1.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방법
먼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 ‘혜정’과 ‘영선’이다. 혜정은 집요하게 효도를 강요받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하지도 못했고, 원치 않는 직장에 일찍 취업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혜정의 삶은 희생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분노했고, 원망했고, 피해의식에 빠져 살았다. ‘영선’은 ‘혜정’의 친구다. ‘영선’은 ‘혜정’과 다르다.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이다.
‘영선’은 ‘혜정’의 삶이 답답하게 짝이 없다.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희생하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영선’은 ‘혜정’에게 “바보처럼 살지 말라!”라고 조언했다. ‘영선’은 결코 희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선’은 희생으로 인해 생기는 우울, 분노, 원망, 피해의식 같은 슬픔은 없다. 영선은 자신의 방식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방법’으로 희생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이 방법도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중략)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중략) 행동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에티카, 제 4부, 정리 24)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는 기쁨을 최대로 하고, 슬픔을 최소로 한다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영선’이 희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은 지혜롭지 못하다. ‘영선’의 목표는 희생하지 않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이들은 희생의 슬픔을 줄이는 데만 급급하고 진정으로 기쁨을 주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혜롭게 희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2. ‘헌신’하는 방법
“아빠, 이제 독립할게요. 이제 할 만큼 해드렸잖아요” ‘혜정’은 집요하게 효도를 강요하던 부모에게 말했다. 혜정은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아니 희생하지 않는 삶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런 그녀가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영선’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오월의 햇살만큼 밝은 미소를 가진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경탄했다.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남자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해, 경탄하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더 이상 부모를 위해 ‘희생’할 수 없었던 게다. 그녀는 ‘헌신’으로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지혜로운 행동이다. ‘희생’에서 벗어나서 슬픔을 줄이고, ‘헌신’을 통해 기쁨을 크게 했기 때문이다.
‘혜정’이야 말로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행동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했으니까. 영선에게 혜정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테다. “부모에게 갖다 바치던 돈을 남자친구에게 갖다 바치는 것 아니냐?”라는 영선의 타박은 무지의 소산이다. 영선은 모른다. 혜정이 삶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혜정은 희생을 끝내고 헌신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슬픔뿐인 삶에서 기쁨이 가득한 삶으로 바뀌었다.
‘영선’처럼, 악착같이 자기 것만 지키려는 이들은 무지해서 안타까운 존재들이다. 슬픔을 줄이는데 급급해서 큰 기쁨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세상의 수많은 ‘영선’들이 희생과 함께 헌신마저 포기해버린 존재된 이유다. 세상의 수많은 ‘영선’들은 ‘헌신’하는 삶이 얼마나 유쾌하고 명랑한 삶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바보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혜정이 영선에게 돌려주어야 할 말이다.
‘희생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언제나 악착같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쪽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다. 그 결론은 우리네 삶을 작은 슬픔에 머물게 한다.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둘이다. 하지만 희생에서 벗어나 더 큰 기쁨으로 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헌신하는 삶! 희생하는 삶을 제대로 끝내고 싶다면, 경탄스러우면서 사랑하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경탄스러운 존재를 만나고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될 때, 희생하는 삶은 없다. 기쁜 헌신의 삶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