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에 열광하는 이유
지식인과 지성인
한동안 멘토열풍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 열풍은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멘토를 찾고 있으니까. 멘토 열풍은 사람들을 학교와 학원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했다. 멘토는 학교와 학원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대체 멘토는 어떤 사람일까? ‘멘토를 찾아서 학교와 학원을 뛰쳐나왔다’는 말에서 이미 질문의 답이 숨어 있다. 학교와 학원에 누가 있을까? 선생이다.
하지만 선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멘토가 아니다. 선생은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여, 선생은 ‘지식인’이라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전공 교수와 영어 강사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멘토는 누구인가? 선생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멘토는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여, 멘토는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에 몸담은 많은 이들이 멘토로 불렸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다.
인문학은 특정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다보면 지식을 넘어 지혜를 가진 지성인이 된다. 이것이 많은 인문학자들이 멘토의 역할을 하게 된 이유다. 연기, 가수 등 특정한 직업의 멘토들도 있는데 이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또한 지식인은 아니다. 이들은 단지 노래, 연기 잘하는 지식을 알려주기보다 삶의 자세나 방향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다.
멘토에 열광하는 이유
흔히 말하는 멘토는 시대의 ‘지성인’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지성인을 찾을까? 지식인은 지식을 전해줄 뿐,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에 대해 해줄 말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작 지식인 자신의 삶이 불안하고 흔들리는데 누구에게 건강하고 유쾌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단 말인가. 조금의 섬세함이 있는 이들은 다 느낀다. 전공 교수와 영어 강사의 삶의 불안과 균열을. 조금의 영민함이 있는 이들은 다 안다. 전공과 영어 지식 내 삶의 불안과 균열을 잦아들게 하지 못할 거란 걸.
‘열심히 지식을 쌓아봐야 존재론적 불안과 균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울한 진단. ‘지혜를 얻으면 존재론적 불안과 균열을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 전망. 이 암울한 진단과 희망적 전망이 바로 사람들이 멘토 혹은 지성인을 찾아 거리를 뛰어나온 이유다. 그렇다면, 멘토의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엇이 남았을까? 지성인을 찾아 헤맸던 이들은 지혜를 얻었을까? 아니었다. 그들은 지혜를 얻지 못했다.
멘토 혹은 지성인들의 잘못이었는지, 그들을 찾았던 이들의 잘못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지혜’를 원했던 이들이 얻었던 것은 ‘의존’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왜 안 그랬을까? 멘토를 찾으려했던 많은 이들은 삶의 불안과 균열에 힘들어했던 사람들 아니었나. 그들에게 멘토들이 건넨 위로와 위안은 너무나 달콤하다. 지혜를 찾고자했던 처음의 의지는 온데간데없고, 얄팍한 위로와 위안에 중독되어 멘토에게 ‘의존’하게 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삶의 불안과 균열에서 벗어나 의연하고 강건한 삶을 바라서 지혜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그토록 간절히 멘토와 지성인를 찾았다. 하지만 거기서 얻은 것이 더 깊은 불안과 균열을 일으킬 의존이라니. 이보다 서글픈 역설도 없을 테다. 우리는 지혜로운 지성인이 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불안과 균열에 내몰렸을 뿐이다. 이제 멘토나 지성인을 찾을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바로 우리가 당당하고 씩씩한 지성인이 될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떻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신’
스피노자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먼저, 스피노자는 ‘지성’이란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현실적으로 유한하든 무한하든 간에 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의 속성과 변용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티카, 제 1부, 정리 30)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만큼 난해하다.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보자. 우선 스피노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한한 지성’과 ‘무한한 지성’이다. 이는 지성에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지성(유한한 지성)이 있고, 또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성(무한한 지성)이 있다는 의미다. 유한한 지성은 무엇이고, 무한한 지성이 무엇인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유한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없는 한정이 되어 있는 지성. 무한한 지성은 신의 지성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한정이 없는 지성. 하지만 여기서 오해는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적 혹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신은 초월적이다. 모든 것을 초월해 있기에 전지전능하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자연'이다.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제 1부, 정리 18)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무엇일까? 스피노자의 ‘신’은 내재적 원인이다. 즉, 세상 전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 세상만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존재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물셀 틈 없는 촘촘한 논리로 그 ‘신’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파격적이다. 바로 ‘자연’이다. 신은 ‘자연’이다. 정확히는 자연 그 자체. 달리 말해, ‘자연’이 ‘자연’되게, ‘자연’스럽게 하는 어떤 힘.
그것이 스피노자의 ‘신’ 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새가 지저귀고, 생명이 탄생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은 자연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 그 자체다. 스피노자는 그 ‘자연’을 ‘자연’되게 하는 어떤 힘이 바로 ‘신’이라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지성’
스피노자의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지성은 “자연(신)의 속성들과 자연의 변용(변화)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자연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 파악해야지만 인간의 지성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고민해 봐야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자연이 신이라면, 두 가지 신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자연에는 두 가지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생산된 자연’과 ‘생산하는 자연’로 구분된다. 꽃, 바람, 파도, 새, 눈, 비 같은 개별적인 자연물이 있다. 이것은 ‘생산된 자연’이다. 하지만 그 꽃을 피게 하고, 바람을 불게하고, 파도를 치게 하고, 새를 탄생시키고, 눈과 비를 내리게 하는 자연 그 자체가 있다. 이것은 ‘생산하는 자연’이다. 이 둘 모두 자연이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능산적 자연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하여 파악되는 것, 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들, 즉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의 신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소산적 자연은 나는,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혹은 신의 각 속성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 도 파악될 수도 없는 것들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의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들이라고 이해한다.” (에티카, 제 1부, 정리 29, 주석)
스피노자가 말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은 ‘생산하는 자연’을 의미한다.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는 ‘생산된 자연’을 의미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신’은 ‘능산적 자연’이다. 이 ‘능산적 자연’(자연 그 자체)이 모든 ‘소산적 자연’(자연물)을 만들어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산적 자’연이 단순한 피조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소산적 자연’에는 ‘능산적 자연’이 담겨 있다. 즉, ‘소산적 자연’은 작은 ‘신’(자연)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소산적 자연은 능산적 자연(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양태’라는 말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의미다. 능산적 자연은 어떤 힘이기 때문에 볼 수 없다. 하지만 볼 수 있다. 소산적 자연이라는 양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새가 지저귀고, 생명이 탄생하는 ‘소산적 자연’이라는 모든 양태를 통해 ‘능산적 자연’을 본다. ‘능산적 자연’은 ‘소산적 자연’을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는 볼 수 없는 ‘능산적 자연’을 본다.
‘자연’을 모르면 '지성'은 없다.
“어떻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질문으로 돌아가자. 능산적 자연이든, 소산적 자연이든,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성은 자연에 관련된 문제다. ‘자연’의 속성과 그 변용(변화)을 파악함으로써 지성을 얻게 된다. 달리 말해, ‘자연’을 모르면 지혜로운 지성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은 ‘있는 그대로’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을 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우리가 지성인이 되지 못한 이유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달리 말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지성인이 되지 못한다. 의아할지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세상)을 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라고 의아할 수도 있다. 소산적 자연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산, 나무, 바다, 꽃, 부모, 친구, 연인 같은 소산적 자연들을 보는 것은 쉽다. 이것이 산이고, 저것이 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람이 부모고, 이 사람이 친구라고 파악하니까.
하지만 능산적 자연은 어떤가? 그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을까? 산과 바다는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산과 바다가 되었는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부모와 친구는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부모와 친구가 되었는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어렵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소산적 자연만을 본다. 그 ‘소산적 자연’을 있게 한 ‘능산적 자연’을 보지 못한다. 그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능산적 자연과 진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참 어렵고 힘든 일이다. 불교에는 ‘진여’眞如라는 개념이 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이 진여를 본다는 것이 불교의 궁극, 즉, 열반과 깨달음으로 인해 부처가 되는 길이다. ‘진여’에 도달하기가 어렵기에 많은 이들이 고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는 불교의 ‘진여’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능산적 자연’ 혹은 ‘진여’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파악하다는 말이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의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때 우리는 지성인이 된다.
부모·친구·연인이 “넌 왜 항상 제멋대로야!”라고 했을 때 지식인은 그네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있다. 하지만 지성인은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그네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네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연결과 과정 자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대한 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한 지식인이 그리도 많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흔한 지식인들은 소산적 자연들을 볼 뿐, 능산적 자연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노숙자, 성소수자, 장애인을 볼 뿐, 그들이 어떤 연결과 마주침의 과정을 통해 그리 되었는지 보지 못한다. 반면 지성인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숙자, 성소수자, 장애인은 불운이라 할 만한 연결과 과정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이고, 누구에게나 그런 연결과 과정이 닥쳐올 수 있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씩씩한 지성인을 위하여.
지성인이 되고 싶다면 멘토나 지성인을 따라다닐 필요 없다.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것! ‘능산적 자연’ 혹은 ‘진여’를 보려고 노력하면 된다. 완전한 ‘능산적 자연’과 ‘진여’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테다. 세상의 모든 것의 연결과 그 연결의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려는 부단한 노력은 할 수 있다.
그 노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오래 쓴, 그래서 쓰고 있는지 조차 잊어버린 안경을 벗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보아왔던 익숙한 세상이 당연한 세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 그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이 본 세상이 당연한 세상이라 믿고 있는 집착. 그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할 테다. 그렇게 아름답고 씩씩한 지성인이 되어 갈 테다.
지성인은 아름답다.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과 균열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게 되면 알 수 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을. 누구도 존재론적 불안과 균열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모종의 평안을 얻게 된다. 멘토니 지성인이니 하는 인간들도 다들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과 균열을 떠안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때 느껴지는 평안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성인은 씩씩하다. 용기 있게 삶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산적 자연 혹은 진여의 끄트머리라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달리 말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어떤 연결과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는지 보이기 시작할 때 놀라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가부장적 세계, 자본주의적 세계, 권위적 세계, 국가적 세계 그 모든 것이 모두 허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삶의 진실에 직면한 이는 씩씩하게 외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삶의 진실을 외치는 이는 얼마나 씩씩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