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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신에 휘둘릴까요?"

스피노자의 '미신'

미신에 휘둘리는 사람들


“안 씻었어?”

“어, 씻으면 시험을 망치더라고”


‘소영’이는 시험 기간이면 씻지 않는다. 그녀의 징크스다. 그 징크스가 터무니없다고 놀리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씻으면 공부한 게 씻겨 내려간다.’는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징크스는 미신이다. 미신이 무엇인가? 합리적 근거와 개연성이 없는 일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다. 이런 미신은 많다. ‘굿·점·사주’부터 ‘타로·별자리운세·오늘(신년)운세·궁합’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미신들 속에서 살아 간도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일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다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며 사는 세상 아닌가. 이런 세상에 미신이 이토록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다. ‘합리적 세상 안의 비합리성’이란 역설은 흥미롭다. 하지만 이 미신을 그저 놀랍고 흥미로운 역설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미신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에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훨씬 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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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은 해롭다.


‘소영’의 징크스를 생각해보자. 그 징크스에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정서적 안정감이다. 쉽게 말해, 안 씻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시험 기간이 길어지면 곤혹스러워했다. 일주일을 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화장실을 갔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씻게 되면 불안해하느라 정작 시험에 집중하지 못했다. 미신의 부정적 효과다. 미신에 매인 삶은 건강한 삶과 거리가 멀다. 미신은 해롭다. 작은 미신은 작게, 큰 미신은 크게 해롭다.


징크스는 비교적 작은 미신에 속한다. 미신의 부정적 효과는 여타 다른 미신들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 점집의 말에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여행을 취소하는 사람이 있다. ‘궁합이 나쁘다’는 말에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이도 있다. 심지어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보다 굿을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이 분명 정서적 안정감을 얻었을 테다. 이런 정서적 안정감은 건강한 것일까?


아니다. 정서적 안정감을 얻는 대가로 더 큰 것을 잃었다. 삶을 성찰할 여행을 가지 못했고, 삶을 함께할 연인을 떠나보냈고, 아이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삶. 그것을 건강한 삶이라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닌 척 해도 우리는 크고 작은 미신에 휘둘리는 산다. 미신에 매인 삶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미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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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미신’


스피노자는 미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스피노자는 미신의 기원이 ‘희망’과 ‘공포’라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희망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불안정한) 기쁨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12)


공포(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불안정한) 슬픔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 13)


‘희망’과 ‘공포’는 어렵지 않다. 희망은 불확실한 기쁨이고, 공포는 불확실한 슬픔이다. 다시 ‘소영’의 징크스로 돌아가 보자. 그녀의 희망과 공포는 무엇일까? 좋은 성적이 희망이고, 나쁜 성적이 공포다. 그녀는 시험기간이면, 좋은 성적이라는 의심되는 미래의 ‘불확실한 기쁨’(희망)을 누린다. 또 동시에 나쁜 성적이라는 의심되는 미래의 ‘불확실한 슬픔’(공포)에 빠진다. 그런데 소영의 ‘희망’과 ‘공포’가 그녀의 징크스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여기서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좋은 성적을 희망하고 나쁜 성적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비단 ‘소영’ 뿐인 걸까? 아니다.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다. 많은 아이들이 소영과 동일한 혹은 유사한 희망과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씻지 않은 징크스(미신)에 빠지지는 않는다. 희망과 공포가 미신의 기원이라면, 왜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미신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미신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희망과 공포가 어떻게 미신이 되는 걸까?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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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의 기원, 희망과 공포


그 어떤 것이라도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모든 사람이 희망과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그 희망과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우연적으로 정해진다. ‘대진’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씻지 않는 징크스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대진’이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오늘의 운세’를 꼭 챙겨본다. 둘은 무슨 차이일까? ‘소영’은 씻지 않고 시험을 본 날 성적이 좋았다. 우연이다. ‘씻지 않음’이 우연히 희망의 원인이 된 셈이다. 그와 동시에 ‘씻음’은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소영’이 믿는 징크스의 기원이다.


‘대진’이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우연히 읽은 ‘오늘의 운세’를 읽었다. ‘빨간색을 피하라!’는 말에 넥타이를 파란색으로 바꿔 맸다. 그날 미팅은 잘 풀려서 좋은 성과를 내었다. 우연이다. ‘오늘의 운세’가 우연히 희망이 원인이 된 셈이다. 그와 동시에 ‘오늘의 운세’를 읽지 않거나 그 운세를 따르지 않는 것은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대진’이 믿는 미신의 기원이다.


“어떤 것이라도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이 말 미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우연히 맺어진 ‘원인(씻지 않음, 오늘의 운세)-결과(좋은 성적, 미팅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희망과 공포가 미신을 탄생시킨다. 다른 미신들도 마찬가지다. 굿, 점, 사주, 타로, 궁합, 별자리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우연한 인과관계에 의해 어떤 대상이 우리네 삶의 희망과 공포의 원인이 될 때, 우리를 사로잡는 미신이 탄생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희망과 공포를 느끼지만 그 희망과 공포의 원인은 각자 삶의 맥락에서 우연히 만들어진다. 이것이 미신의 기원이다. 이런 미신의 기원이, 사람마다 빠져 있는 미신의 종류가 다른 이유를 말해준다. 또한 이것이 자신의 역시 미신에 빠져 있으면서 타인의의 미신에 대해 어리석다 말하는 이유도 말해준다. ‘오늘 운세를 봐야 일이 잘 풀린다.’는 타인의 믿음은 우연의 결과(미신)라고 쉽게 판단하지만, ‘씻지 않아 시험을 잘 본다.’는 자신의 믿음은 필연의 결과(합리적 판단)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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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스피노자는 이런 미신에 대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되는 사물은 좋은 징조 또는 불길한 징조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징조들은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인 한에 있어서, 기쁨 또는 슬픔의 원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좋은 징조, 불길한 징조)을 사랑하거나 증오하며, 또 그것들을 우리가 희망하는 사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거나, 장애 또는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주석)


스피노자는 우연히 희망의 원인이 된 것을 ‘좋은 징조’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연히 공포의 원인이 된 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신 아닌가. 미신이란 결국 ‘좋은 징조’와 ‘불길한 징조’를 구별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좋은 징조는 기쁨을 주고, 불길한 징조는 슬픔을 준다고 말한다. 이제 왜 우리네 삶에서 미신이 끊이지 않는지 알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다. 동시에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 놓인 존재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두 가지 조건에서 미신이 출현한다.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 존재다. 이런 인간에게 미신은 너무 매혹적이다. 왜 안 그럴까? 좋은 징조를 통해 ‘불확실한 기쁨’(희망)을 실현할 수 있고, 불길한 징조를 통해 ‘불확실한 슬픔’(공포)을 비껴갈 수 있을 테니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미신을 “희망하는 사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거나” 미신을 통해, “장애 또는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면 미신 역시 이해하게 된다. 어찌 보면, 인간이 가진 미신에 대한 저마다의 열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가 생긴 이후로 미신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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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이 해로운 이유

미신은 해롭다. 미신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럽다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다. 왜 그런가? 미신의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더 큰 까닭이다. 미신의 거의 유일한 긍정적 효과는 ‘정서적 안정감’이다. 그런데 이 ‘정서적 안정감’(“안 씻으면 성적이 좋을 거야”)은 근본적으로 극심한 ‘정서적 불안감’(“성적이 나쁘면 어쩌지”) 위에 존재한다. 이는 미신을 통한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려면 먼저 ‘정서적 불안감’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미신은 불행이라는 토대 위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는 행위인 셈이다.


결국 미신의 출발점은 인간의 나약함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불확실함을 불확실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함. 미신의 매혹은 우리의 나약함에 기원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점집과 사주, 징크스와 오늘의 운세로 거짓 확실성을 보증 받으려는 사람들. 사랑의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해, 타로와 궁합으로 거짓 확실성을 보증 받으려는 사람들.


이들이 도달하는 곳은 안정된 확실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불안과 걱정이다. 미신은 이토록 해롭다. 크고 작은 미신들이 주는 헛된 정서적 안정감을 대가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었던가.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강건하게 지켜내는 삶. 그런 씩씩한 삶. 그것은 미신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들러붙은 크고 작은 미신들을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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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징조 속으로 뛰어 들기


우리는 희망하는 것을 쉽게 믿지만, 공포를 느끼는 것을 쉽사리 믿지 않도록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전자(좋은 징조)에 대해서는 적정 이상으로 후자(불길한 징조)에 대해서는 적정 이하로 평가하도록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도처의 인간을 괴롭히는 미신의 기원이다. (에티카, 제3부, 정리50, 주석)


스피노자는 인간을 희망하는 것을 쉽게 믿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을 쉽사리 믿지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여, 인간은 좋은 징조는 적정 이상으로, 불길한 징조는 적정 이하로 평가하도록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사주를 좋게 말해주는 점집은 더 자주(적정 이상 평가) 찾고, 사주를 나쁘게 말하는 점집은 덜 찾게(적정 이하 평가) 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것이 인간을 괴롭히는 미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신으로부터 휘둘리지 않을 방법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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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 나는 한 때 갖가지 미신에 휘둘리며 살았다. 4시 44분 우연히 시계를 보게 되면 괜히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시험 치기 전에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갑에 넣어준 부적을 모른 척 갖고 다녔다. 여자 친구가 있을 때 덕수궁 돌담길은 걷지 않았다. 괜한 짓해서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미신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갖가지 미신들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그것은 내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미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미신의 기원을 뒤집어서 적용했다. 좋은 징조를 적정 이하로, 불길한 징조를 적정 이상으로 평가했다. 비유하자면, 사주를 나쁘게 말하는 점집을 집요하게 더 찾아다닌 셈이다. 정말로 그랬다. 의도적으로 4시 44분에 시계를 쳐다봤다. 시험 치기 전에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어머니가 지갑에 넣어준 부적을 찢어버렸다. 여자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혹은 그럴까봐 문득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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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길한 징조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알게 되었다. 불길한 징조와 안 좋은 일 사이에 그 어떤 상관관계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삶. 그것은 내면적 나약함을 벗어나 강건하고 씩씩한 내면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리느니, 당당하게 불행을 맞이하겠다는 씩씩함. 미신에 휘둘리고 있다면, 불길한 징조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 알게 된다. 미신을 위반해도, 별일 안 일어난다는 것. 설사 안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우연의 결과 일뿐, 불길한 징조와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 그렇게 미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미신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진정한 정서적 안정감이 찾아온다. 미신이 주었던 정서적 안정감은 정서적 불안정으로부터 파생된 것 아닌가. 그래서 이는 삶을 부자유하게 정서적 안정감이다. “씻으면 안 돼!” “물 건너 여행 가면 안 돼!” “궁합이 안 맞는 사람은 안 돼!” 이런 부자유를 통해 얻게 된 안정감이다. 하지만 미신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안정감은 삶을 자유롭게 하는 정서적 안정감이다. 씻고 싶을 때 씻고, 여행가고 싶을 때 여행 가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 이런 진짜 정서적 안정감은 반드시 더 기쁜 삶으로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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