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까요?"

스피노자의 '선'과 '악'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 or “착하게 살면 호구 된다.”


삶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앎과 삶이 불일치할 때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학교에서 배워서 안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어떤가?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학교에서 착한 아이는 만만한 친구가 되어 놀림감이 되거나 빵셔틀이 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착한 직원은 만만한 동료가 되어 욕받이가 되거나 이일 저일 다 떠맡게 된다. 그렇게 착한 이들은 겨우 입口에 풀칠糊이나 하는 호구糊口가 된다.


착함을 내던지는 이들이 있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혹은 호구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이들.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이들. 착함을 내던지는 이런 부류는 혼란스럽지 않다. 삶이 명징하다. 이들은 ‘나에게 더 많은 이득을 안겨줄 악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뿐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들이 있다. 제 한 몸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착함을 미뤄두고 있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들.


왕따인 친구를 외면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불편한 아이. 노숙자를 볼 때 마다 마음이 불편한 학생.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동료를 보며 마음이 불편한 직장인. 착함을 잠시 미뤄두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노숙자에게 줄 돈을 아끼기 위해서, 직장에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다들 제 한 몸 지키기 위해서 잠시 착함을 미뤄두고 있다.


착함을 미뤄둔 이들은 혼란스럽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잘사는 것일까?’ 늘 고민되는 까닭이다. 나는 착함을 내던진 이들보다 착함을 잠시 미뤄둔 이들이 세상에 더 많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명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뒤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묻자. “착하게 살면 호구糊口가 될까요?”


KakaoTalk_20190927_110435331.jpg


스피노자의 ‘선’과 ‘악’


흔히 말하는 착함은 무엇인가? ‘선’善이다. 그리고 그 반대 나쁨은 ‘악’惡이다. ‘선’하게 살게 살고 ‘악’하게 살지 않으면 정말 호구가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기 전에 ‘선’과 ‘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선’과 ‘악’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들어보자.


나는 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기쁨을 가져 오는 것, 그리고 특히 온갖 종류의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악을 모든 종류의 슬픔, 그리고 특히 열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39, 주석)


스피노자는 기쁨을 주는 것을 ‘선’, 슬픔을 주는 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이런 ‘선/악’ 개념은 파격적이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선/악’ 개념은 어떤가? 그것은 ‘사회’적인 개념이다. 쉽게 말해, 선(good)은 사회적으로 옳은 것이고, 악(evil)은 사회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것은 ‘선’이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사회적 합의와 약속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선/악'은 전혀 다르다. 스피노자의 선과 악은 ‘개별’적이다. 달리 말해, 일반적 선/악 개념이 ‘우리’(사회적)와 관계한다면,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나’(개별적)와 관계한다. 즉 ‘나’가 기쁨을 느끼면 선(good), 슬픔을 느끼면 악(bad)이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을 따르면 기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선’(good)이 된다. 또 쓰레기를 줍는 것이 슬픔을 준다면 그것이 ‘악’(bad)이 된다.


KakaoTalk_20190927_110439404.jpg


기쁨='선', 슬픔='악'


이 얼마나 파격적인가.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선이 되고,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 악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분명 파격적이다. 하지만 그 파격은 ‘궤변의 파격’이 아니다. ‘진실의 파격’이다. 긴 시간 은폐해둔 삶의 진실을 드러내었기에 느껴지는 파격. 스피노자의 선악 개념은 낯설지만 분명 옳다. 스피노자는 선악 개념이 왜 개별적인 단독자의 기쁨과 슬픔에 관계 된 것인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9, 주석)


‘쓰레기를 줍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 “어떤 것(쓰레기 줍는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은 그 반대다. 먼저 “그 어떤 것(쓰레기를 줍는 것)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쉽게 말해, 쓰레기를 줍는 것이 ‘선’인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했기 때문이다.


wood-4367212_1920.jpg


‘좋음’이 ‘옳음’을, ‘싫음’이 ‘그름’을 만든다.


스피노자는 ‘사회적 옳음’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좋음’이 먼저 존재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 ‘개별적인 좋음’에 사람들이 ‘선’(good)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사회적 옳음’(선)이 탄생하게 된다. 다시 묻자. 쓰레기를 줍는 것이 왜 ‘선’(사회적 옮음)인가? 사람들이 깨끗한 거리(개별적 좋음)를 욕구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선’은 ‘단독적 선’에 기초해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해, ‘사회적 옳음’(선)은 ‘단독적 좋음’의 결과다.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39, 주석)


‘악’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악(evil)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적 그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개별적 싫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개별적 싫음(bad)'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적 그름’(evil)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결코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지 않는) 혐오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악이 된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사물을 악이라고 부른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선(good)·악(evil)의 구분이 다른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구성원들의 좋음(good)·싫음(bad)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정돈되지 않은 거리(무질서)를 ‘좋음’으로, 정돈된 거리(질서)를 ‘싫음’으로 느낀다면 어떨까? 그 사회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옮음’(선), 쓰레기 줍는 것이 ‘그름’(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정은 황당한 망상도, 과도한 비약도 아니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생각해보자. 지금은 이성애를 ‘선’(사회적 옳음)으로, 동성애를 ‘악’(사회적 그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이라는 법적(사회적) 제도를 생각해보면 된다. 법적으로 결혼은 이성 간에만 허용된다. 법적으로 동성 결혼이 금지된 것은, 그것이 사회적 그름(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달랐다.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는 ‘연애는 남자끼리, 결혼은 남녀끼리’라는 구호가 일반적인 사회였다.


statue-3345290_1920.jpg


선·악의 상대성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성애를 ‘악’(사회적 그름, evil)이라고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동성애를 ‘선’(사회적 옳음, good)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과 고대 그리스 사이의 선(good)·악(evil)의 구분은 다르다. 왜 그럴까? 해당 구성원들의 ‘좋음’(good)과 ‘싫음’(bad)의 차이 때문이다. 지금은 이성애를 ‘좋음’으로, 동성애를 ‘싫음’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시대의 동성애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혐오하는 사물”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사물이었다. 지혜로운 성인 남성이 미소년과 육체적 정서적 관계를 맺는 일은 권장할 만한 ‘좋은’ 일이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동성애는 ‘악’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이유다. 원하고 추구하고 욕구하는 것은 ‘선’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은 ‘악’으로 판단되는 까닭이다. 결국 ‘선’의 기원은 ‘좋음’이고, ‘악’의 기원은 ‘싫음’이다. 스피노자는 선/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시적으로 말한다.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가장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39, 주석)


선악의 구분은 감정에서 온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좋은 것(기쁨)이고, 더 나쁜 것(슬픔)인지를 판단하는 감정. 그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에 의해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인지 악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선이란 기쁨을 가져주는 일이고, 악이란 슬픔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흔히 말해는 사회적 선(악)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 기쁨(슬픔)의 감정을 가져다주었던 일의 잠정적 결과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선’은 ‘사회적 옳음’(good)이 아니라 '개별적인 기쁨'(good)이고, ‘악’은 '사회적 그름'(evil)이 아니라 '개별적인 슬픔'(bad)이다.


people-talking-1876726_1920.jpg


착하게 살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선하게(착하게) 살면 정말 호구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 반대다.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지 않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선/악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선/악’이다. 스피노자의 ‘선/악’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 아닌가.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이 업무는 김 대리가 해줘요.” 직장 동료의 요청이다. 하지만 ‘김 대리’는 이미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몇 일째 야근 중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업무는 ‘김 대리’ 관련 업무도 아니다. ‘선’하게 살려는 김 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그럴게요.”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그건 ‘악’한 행동이다. 그 업무를 맡았다간 더 큰 슬픔에 빠질 테니까 말이다. “싫어요. 그건 제 제 업무가 아니에요.” 이것이 ‘선’한 행동이다. 슬픔(업무)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기쁨(칼퇴)을 조금이라도 늘려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기쁨을 따르는, 즉 ‘선’하게 사는 사람은 결코 호구가 되는 법이 없다. 슬픔을 따르는, 즉 ‘악’하게 살려는 사람이 호구가 된다. 자신의 기쁨은 뒷전으로 하는 이들. 타인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슬픔을 늘려가는 이들. 그런 ‘악’한 이들이 호구가 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누구들 기쁘게(선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세상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준다. 그것이 걱정되고 두려워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산다.


building-1210022_1920.jpg


호구가 되지 않으려다 더 큰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직장 역시 그렇지 않은가. 직장에서 ‘선’(할 말 다하고, 추가 업무를 거부하고, 칼퇴를 하면)을 행하면 불량직원으로 찍혀 불이익을 받을 것만 같다. 그것이 두려워 ‘악’(할 말 못하고, 이일저일 다하고, 야근을 하며) 행하며 산다. ‘호구가 되지 않으려다 더 큰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이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호구적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걱정할 것 없다. 계속 ‘선’하게 살면 된다. 하지만 ‘선’에는 ‘작은 선’과 ‘큰 선’이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우선 ‘작은 선’부터 이야기해보자.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직원은 결코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그네들은 강단 있는 직원이 되지 불량 직원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선한(기쁨을 늘리려는) 직원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은 단호하게 ‘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일은 비교적 유능하게 처리하게 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어떤 경우든 ‘선’하게 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쁨(밥벌이)은 유지하고 슬픔(야근, 해고)을 줄여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직원의 선은 ‘작은 선’이다. 그것은 왜 ‘작은 선’인가?


강단 있는 직원의 삶을 살펴보자. 만나고 싶지 않은 이(슬픔)들 속에서 하기 싫은 일(슬픔)로 밥벌이(기쁨)를 하는 삶이다. 그네들은 밥벌이(기쁨)는 하면서 더 큰 슬픔(야근, 해고)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우 막고 있을 뿐이다. 강단 있는 직원은 기쁨을 크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주어진 슬픔을 줄여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선은 작은 기쁨을 누리는 ‘작은 선’이다. 서글프게도,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이들 역시 때로 호구가 된다. 왜 그런가?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의 거의 유일한 기쁨이 돈인 까닭이다.


역설적이게도, ‘작은 선’을 행하는 이들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 집중한다. 기쁨을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줄이는 선을 행하려 한다. 작은 선을 행하는 이들은 슬픔의 근원(직장)을 벗어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돈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작은 선’이 항상 돈으로 귀결되는 이유이다.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이 어떻게 호구가 되는지 알겠다.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은 주식으로 월급을 탕진하고, 엄한 곳에 투자해서 재산을 날리고, 심지어 사기를 당하는 호구가 된다. 쉽게 말해, ‘악’을 행하며 사는 이들은 직장 안에서 호구가 되고,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이들은 직장 밖에서 호구가 되는 셈이다.


steve-jobs-1049872_1920.jpg


‘큰 선’을 행하는 삶


근본적으로 호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큰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으로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 일이 없다. 아니 강건한 삶의 주인이 된다. 큰 기쁨을 따르는 자는 삶의 주인이 된다. 대기업을 다니다 전업 작가로 전향한 이를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산지 몇 년이 흘렀을 때 돈이 없었다. 보험, 적금은 이미 다 해지해서 생활비로 썼고, 잔고도 바닥났다. 그 즈음 예전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할 것인데 함께 일해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돈을 자신이 댈 테니 직장을 다닐 때 일을 해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혹 할 제안이었다. 작가는 별 고민 없이 거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큰 선’(글쓰기)을 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악’(직장)은 물론이고 ‘작은 선’(돈)도 강건하게 거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 작가는 호구가 될 일이 없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직장 안에서 호구가 될 일도 없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직장 밖에서도 호구 잡힐 일이 없다.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큰 선’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은 고될지라도, 큰 기쁨을 누리며 살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왜 ‘큰 선’을 행하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다. 큰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이 우리가 ‘악’과 ‘작은 선’을 행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큰 기쁨을 줄 일을 모르기에 슬픔을 줄 일을 하거나 작은 기쁨을 줄 일에 집착하게 되니까 말이다.


20190418_113842.png


호구를 넘어 삶의 주인이 되는 법


각자는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유용한지 아니면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39, 주석)


호구를 넘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의 ‘큰 선’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즉 어떤 것이 유용하고 유용하지 않은지는 감정에 의해서 판단된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 ‘큰 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피는 연습이 필요하다. 분명 돈을 벌었을 때 혹은 쓸 때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기쁨인지, 혹은 그보다 더 기쁨을 주는 일은 없는지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이 연습이 부족해서 악과 작은 선에 휩쓸려 살게 된다.


호구를 벗어나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을 살펴야 한다. 나에게 가장 큰 기쁨 혹은 가장 큰 슬픔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큰 선’과 ‘큰 악’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호구를 넘어 강건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거꾸로 된 믿음을 바로 세울 때다. 삶의 주인이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찾고 강건하게 그 기쁨을 줄 일을 해나가는 이가 삶의 주인이 된다. 삶의 주인을 꿈꾸는 이들이 부여잡고 살아야 할 질문은 이것뿐이다. “나의 큰 선은 무엇이며, 그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겠는가?”

keyword
이전 21화"왜 미신에 휘둘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