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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피노자의 '멸시' '과대평가'

오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슬픔의 원인


“너 요즘 이직 준비 하냐?”
“네? 아닌데요.”
“근데, 왜 요새 매일 일찍 퇴근하고, 또 일처리는 왜 그 따위야?”


팀장의 냉소적인 채근이다. 그녀는 억울하다. 일찍 퇴근하고 일처리가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이직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 때문이다. 두 분이 모두 편찮으셔서 매일 병원에 모셔다 드려야 했다. 부모님 걱정, 경제적 부담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모른 체, 팀장은 그녀를 오해했다. 그 오해가 서럽고 억울해서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비단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네 일상의 다른 오해들도 마찬가지다.


본적 없는 지갑을 훔쳤다고 오해를 받는 경우. 내가 하지 않았던 말이 내가 한 말처럼 되어 있는 경우. 앞 사람이 떨어트린 돈을 주워주려고 줍는 찰나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의 눈빛을 받는 경우.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표현하려 했는데 스토커 취급을 받는 경우. 이처럼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오해를 받거나 혹은 내가 어떤 행동을 했더라도 그 의도를 오해 받을 때가 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서럽고 억울한 일이다. 직장, 연애, 가족, 친구 등 우리 주의의 모든 관계에서 오해만큼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이 오해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직장, 연애, 가족, 친구 등 모든 관계는 이미 오해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다. 인간만큼 자의식이 강한 동물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본다.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오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오해는 세상에 넘쳐나며 동시에 우리를 슬픔에 빠뜨린다. 우리는 이 피할 길 없어서 보이는 불행을 잘 다루기 위해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오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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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멸시’


스피노자는 ‘오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한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를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오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추론해볼 수 있다. 오해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비춰본다면, 스피노자는 ‘오해’를 ‘멸시’와 ‘과대평가’, ‘자기비하’와 ‘거만’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설명할 테다. 이 네 가지 오해에 대해서 하나씩 차근히 알아가보자.


멸시란 증오(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적당한 것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22)


멸시는 오해다. 어떤 오해인가? 누군가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게 되는 오해다. 팀장은 그녀를 오해했다. 그녀가 이직을 하려고 매일 일찍 퇴근하고 일처리가 미흡한 것이라 오해했다. 팀장은 왜 그녀를 오해했을까? 그의 강한 자의식 때문에? 달리 말해, 팀장 자신이 일찍 퇴근하고 일처리가 미흡했을 때가 이직을 생각했을 때였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녀 말고 다른 후배가 일찍 퇴근하고 일처리가 미흡했을 때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장은 유독 그녀만을 오해했다.


강한 자의식은 오해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지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그 상사처럼, 강한 자의식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오해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미움이다. 그녀가 오해를 살 행동을 해서 직장 상사가 오해를 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미웠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녀를 향한 미움 때문에 그녀를 정당한 것(평소 회사를 위해 헌신하고 일처리를 꼼꼼하게 했던 것) 이하로 하찮게 여겼던 게다. 직장 상사는 그녀를 ‘멸시’(오해)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멸시’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것을 긍정하려고 노력하며, 반대로 그것을 기쁨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 (에티키, 제 3부, 정리26)


팀장의 멸시는 자연스럽다. 팀장은 그녀(증오하는 것)를 슬픔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생각을 긍정하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그녀를 기쁨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킬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팀장이 그녀를 멸시(오해)하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워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들을 가능한 긍정하려고 노력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을 가능한 부정하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이것이 멸시하는 오해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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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는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감정적 오류다.


‘멸시’라는 오해는 결코 논리적 오류가 아니다. 감정적 오류다. ‘일찍 퇴근·일처리 미흡’이라는 원인에서 ‘이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오류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논리적 오류(논리적 비약)가 여긴다. 얼핏 그런 것도 같다. 적은 원인에서 과도한 결론을 도출한 논리적 오류(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오해다. 상사는 그녀를 평소 미워하면서도 그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감정적 오류가 그녀의 ‘일찍 퇴근·일처리 미흡’이라는 원인에서 ‘이직’이라는 과도한 결론을 끌어낸 이유다.


“그냥 오해였어. 미안해” 오해가 해소될 때 오해 했던 사람이 하는 사과 말이다. 이 사과는 비겁하며 무지하다. “그냥 오해였어”라는 말은 자신이 했던 오해가 논리적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오해는 ‘내 책임이 아니라 네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오해받을 짓을 했으니 오해하는 거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차원에서 비겁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무지하다.


“너를 멸시해서 미안해.” 이것이 오해가 해소되었을 때 오해했던 사람이 해야 할 사과의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오해한다면, 그것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군가를 ‘멸시’, 즉 정당한 것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즉 그것은 명백하게 감정적 오류다. 그래서 진실이 드러나 오해가 풀렸을 때 사과를 해야 한다면, 오해 그 자체를 사과하기보다 그 사람을 미워했다는 사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멸시’라는 오해는 반드시 미움으로부터 발생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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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과대평가'


오해에는 ‘멸시’, 즉 정당한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반대도 있다. ‘과대평가’다. 이 과대평가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과대평가란 사랑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21)


‘과대평가’ 역시 오해다. 어떤 오해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되는 오해다. ‘혜원’은 사랑에 빠졌다. “내 남자친구 너무 멋있어. 남자답게 덩치도 크고 먹는 모습도 너무 멋있어.” ‘혜원’은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 남자 친구 자랑을 한 참을 했다. 그 자리에 ‘혜원’의 남자친구가 왔을 때 그녀의 친구들은 긴 당황의 침묵을 견뎌야 했다. 덩치 좋은 남자 대신 배나온 아저씨가 등장했고, 뭐든 잘 먹는 남자 대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남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혜원’은 남자친구를 과대평가(오해)했다. 왜 그랬을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비만, 과식)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겼던 게다. 우리는 증오하는 사람을 오해(멸시)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오해(과대평가)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과대평가 하게 된다. 흔히 ‘과대평가’는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해’라는 단어에는 이미 어떤 슬픔의 정서가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과대평가를 하고, 과대평가를 당하는 오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주기 때문에 이를 오해라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모두 오해다. 그러니 누군가를 정당한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멸시’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과대평가’ 역시 분명한 오해다. 이제 스피노자의 ‘과대평가’와 ‘경멸’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과대평가는 사랑의 한 결과 또는 특성이며, 멸시는 미움의 한 결과 또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과대평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적정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도록 인간을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한에 있어서의 사랑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반대로 멸시는 증오하는 대상에 대하여 적정 이하로 하찮게 여기도록 인간을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한에 있어서의 증오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에티키, 제 3부, 감정의 정의22,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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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나’를 향할 때


‘오해’에 관한 오해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해는 언제나 쌍방향이다. 즉, 오해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자신이 받았던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자신이 했던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때린 사람은 없고 온통 맞은 사람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받는 오해’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하는 오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해’에 관한 오해다. 이런 오해와 관한 오해의 원인은 무엇일까? 자기오해 때문이다.


‘멸시’와 ‘과대평가’라는 오해는 타인을 향해 있다. 그런데 하지만 두 감정이 자신을 향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자기오해가 발생한다. 자신을 멸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 자기 자신을 오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해는 자기오해에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관련된 오해보다 자신에 관련된 오해를 성찰해보는 것은 더 중요하다. 먼저, ‘멸시’가 자신을 향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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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남기는 오해, ‘자기비하’


자기비하(비루함)란 슬픔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 3부, 감정의 정의29)


‘멸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자기비하’가 된다. “내 주제에 뭘 할 수 있겠어” 자기비하의 상태다. 이런 ‘자기비하’라는 이 흔한 감정은 오해다. ‘희선’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 마다 “내 주제에 뭘 할 수 있겠어”라며 ‘자기비하’에 빠진다. 즉, 그녀는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주어진 문제들을 힘껏 극복했던 ‘나’) 이하로 하찮게 여겼다.”


이는 오해다. 자기오해. 그렇다면 이 ‘자기비하’라는 오해는 왜 발생할까? ‘자기비하’는 오해가 남긴 오해다. ‘멸시’라는 오해가 남긴 오해. ‘희선’은 왜 자기비하에 빠졌을까? 아버지 때문이다. “계집애 주제에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유년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그녀를 멸시했다. 그녀의 ‘자기비하’는 아버지의 ‘멸시’가 남긴 상흔이다. 아버지가 했던 오해(멸시) 때문에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오해(자기비하)가 된 셈이다. 아버지의 멸시(오해)가 남긴 그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이 이하로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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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적인 오해, ‘거만’

거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다. (에티카, 제3부, 감정의 정의28)


과대평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거만이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어” 거만의 상태다. ‘거만’이라는 흔한 감정 역시 오해다. ‘민섭’은 공부, 운동, 연애 그것이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어”라며 거만에 빠진다. 즉,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정당한 것(뭐든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겼다.”


이는 오해다. 자기오해. 이 거만이라는 오해는 왜 발생할까? ‘거만’은 유아적인 오해다. ‘자기비하’라는 오해가 외부에서 온다면, ‘거만’이라는 오해는 내부에서 온다. ‘민섭’은 어떻게 거만에 빠졌을까?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외부로 나가지 않고 자신 안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가 공부도, 운동도, 연애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거만해서’가 아니라 ‘거만하기위해서’였다. 민섭의 자기애는 외부의 타자와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기애다. 더 정확히 말해, 세상에 자신 혼자뿐이기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부, 운동, 연애에 최선을 다하면 알게 된다. 세상에 사랑받을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나보다 훌륭한 사람은 언제든 있게 마련이니까.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민섭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민섭의 ‘거만’은 세상 오직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아적인 정신상태의 결과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에 대해 정당한 것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겼다.” 스피노자는 이런 거만을 광기의 일종을 본다.


자기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적정 이상으로 대단하게 (중략) 여기기 십상이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표상이 (중략) 자신에 관계할 때는 거만으로 불리며, 광기의 일종이다. (에티카, 제3부, 정리2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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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벗어나는 법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오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해를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잘 다루어야 한다. ‘오해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오해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까? 아니다.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간은 거대한 자의식 덩어리 아닌가. 그런 존재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오해는 필연적이고 영원하다. 그러니 오해를 잘 다룬다는 것은 오해 자체가 없는 순수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오해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오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오해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갖가지 슬픔을 가져다주기 때문 아닌가. 오해는 그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문제다. 이렇게 오해에 관한 관점을 옮겨볼 수 있다면 이제 오해를 잘 다룰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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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멸시’의 관계를 떠나기.


우선 멸시의 관점에서 오해를 다루는 법을 생각해보자. 멸시는 오해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오해. 이런 오해(멸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오해를 풀려고 한다. “사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일찍 퇴근 한 거예요.” “지갑은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스토킹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편지를 주려던 거였어요.” 오해(멸시)가 풀릴까? 부질없는 짓이다. 그들은 논리적 이유로 우리를 오해한 것이 아니다. 감정적 이유로 오해한 것인 까닭이다. 논리적 오해는 풀려도 정서적 오해(멸시)는 계속된다.


멸시라는 오해를 다루는 원론적 방법은 간명하다. 멸시(오해)하고 싶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 멸시(오해) 받고 싶지 않다면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된다. 멸시는 미움에서 오니까. 때로 원론적 이야기는 이토록 공허하다. 실제 삶에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미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네 현실에서는 불쑥 누군가가 미워지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지 않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멸시는 미움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 미움이 우리를 슬픔으로 내모는 것이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필요 없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때 더 오해가 쌓인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오해(멸시)를 되새김하는 동안 미움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점점 더 큰 슬픔에 빠진다. 멸시하는 쪽이든 멸시를 당하는 쪽이든, 그 관계를 떠나야한다. 그 떠남의 방법과 속도는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조절하면 될 일이다.


이것이 ‘자기비하’를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기비하가 무엇인가? 타인의 멸시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나 자신을 멸시하게 되는 내면적 상태 아닌가. 우리가 멸시의 관계를 떠나면 그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할 일도 없다. 그러면 자연히 ‘자기비하’라는 오해를 할 일도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타인의 멸시를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자기비하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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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대평가’의 관계를 향해 달려가기


과대평가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과대평가도 오해다. 하지만 이 오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오해다. 이 오해는 우리를 구원하는 오해다. 오해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또 오해를 받았던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비만인 나를 덩치가 크다고 오해해 주었고, 나는 사랑하는 그 사람의 까만 얼굴을 섹시함으로 오해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오해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어디 있을까?


오해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과대평가하고 또 과대평가 받을 수 있는 관계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오해를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것이 오해를 잘 다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왜 그런가? 이제 우리는 네 가지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멸시’ ‘자기비하’ ‘과대평가’ ‘거만’ 이 중 멸시, 자기비하, 거만은 우리를 슬픔으로 내모는 오해다. 그리고 이런 오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멸시, 자기비하, 거만이라는 오해는 과대평가라는 오해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과대평가’에 빠진 사람은 누군가를 멸시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멸시를 능히 견뎌낼 수 있다. 과대평가에 빠졌다는 말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멸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에 빠진 이는 누군가의 멸시 정도는 웃으며 흘러버릴 수 있다. 그 멸시를 넘어설 정도로 과대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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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비하’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단 한 번도 ‘과대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깊은 사랑으로 ‘과대평가’ 받아본 이들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과대평가를 받아본 사람에게 ‘자기비하’는 없다. “계집애 주제에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아버지의 멸시가 남긴 자기비하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게 ‘과대평가’라는 오해는 ‘자기비하’라는 오해도 극복할 수 있다.


‘거만’ 역시 마찬가지다. ‘거만’은 잠시의 기쁨 뒤에 파멸의 슬픔을 주는 감정이다. ‘내가 못하는 건 없어’라는 거만은 파멸을 향해 치닫게 하는 감정이다. 마치 ‘수영에서 내가 모르는 건 없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익사를 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거만’이라는 오해 역시 ‘과대평가’로 극복할 수 있다. 거만은 유아적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내면적 상태다. 즉, 거만한 이들은 타자는 없고 자신만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나르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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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언제 그 허황된 자기애를 멈출 수 있을까? 타자를 발견할 때다. 결코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는 타자. 바로 사랑하는 타자다. 그 타자는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는 타자다.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거만’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거만이라는 자기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슬픔을 남기는 오해(멸시, 자기비하, 거만)는 오해(과대평가)로서 극복할 수 있다.


오해에 때문에 삶이 힘들 때, 오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는 더 큰 오해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차라리 과감하게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과대평가’라는 기쁨의 오해로 말이다. 노파심에서 할 말이 있다. 사랑이 끝나, ‘과대평가’마저 끝나면 어쩌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찬란했던 ‘과대평가’의 시간이 지났을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과대평가’를 받았던 그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 되어 있는 기적.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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