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순간부터, 내향적인 사람들에 대한 논의가 많이 되었죠. (관련된 많은 책들이 나왔고, 대표적으로 '콰이어트'라는 책이었죠, 이 책은 그 중 그나마 괜찮은 편이에요) 그런데 이런 논의는 대부분은 '내향성이 잘못된 게 아니다. 외향성과 다른 것일 뿐이다'라는 식이었죠. 이런 '내향-외향' 이분적 도식을 유지하는 논의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 도식의 끝은 대부분, 내향적인 이들의 자기부정을 막는 차원(내향성도 나쁜 게 아니다. 욕하지 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2.
외향성에 부정적인 면이 있듯, 내향성에도 부정적인 면이 있어요. 그걸 직면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내향성의 가장 큰 문제는 '대화의 부재' 그리고 거기서 오는 '자기 객관화 부족'이예요. 내향성을 과도하게 긍정하는 이들은 사람을 안 만나거나 혹은 소수의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죠. 쉽게 말해, 타자(통제 불가능한 사람)를 거부하죠. 내향성의 과도한 긍정은 자기 세계에 매몰되게 하죠. 그래서 그들은 타자와 대화가 안돼요. 자기만의 언어에 익숙해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발생한 '대화의 부재'는 반드시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죠. 내향성을 과도하게 긍정하는 이들은 그 상처가 싫어서 다시 혼자 혹은 소수의 익숙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죠. 그리곤 스스로에게 허망한 위로의 말을 되뇌죠.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어서 어쩔 수 없어."
그 사이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죠. 라캉 말했듯, 우리의 자리는 타자가 지정하죠. '나'는 '타자'가 아닌 존재에요. '나'는 '타자'의 여집합이죠. 그러니 '타자'를 모른다면 '나'를 모르게 되는 거죠. 이것이 내향적인 사람 중 ‘자기 객관화’가 부족한 사람이 흔한 이에요.
내향적인 이들의 불만 중 가장 큰 것은 이거죠. “세상은 나를 오해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오해는 과도하게 내향성을 긍정하는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진심을 말했는데 너는 듣고 있는거야?" “차가 이렇게 더러운데 나보고 타라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상처가 되는 줄 모르는 거야?" 타자와 대화해본 적 없어서 만들어진 공백을 자신만의 언어로 가득 채우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말하는 거예요. “세상은 나를 오해하고 있어”라고. ‘자기 객관화’는 과도하게 내향성을 긍정하려는 이들은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덕스러움이죠. 자기 객관화는 타자와의 대화에서 오니까요.
3.
외향성-내향성 이분법의 도식 너머에 있어야 해요. 외향성은 외향성 자체로 보고, 내향성은 내행성 자체로 고찰해봐야 해요. 둘을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건 어느 한쪽을 과도하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쪽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어요. ‘외향적이지 않은 나’, ‘내향적인 나'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 그 '나'를 고찰해봐요. 거기서 많은 실마리들이 풀려 나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