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박경리와 글쓰기

1. 

“이 사람은 누구야?”

“아빠, 선배야”      


하동에 갔다.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좋아하지 않는 이들을 선배로 부른다는 것을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글 쓰는 사람이어서 좋다. 좋아하는 이들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선빈아, 너도 네가 닮고 싶은 사람들을 선배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들에게 짧은 이야기를 해주고 함께 박경리 선생을 만났다. 



2. 

1926년, 박경리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박경리는 어렵사리 아버지를 찾아갔다. 대학 등록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뺨을 후려갈기는 것을 대답 대신으로 듣고 돌아왔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1946년, 박경리는 결혼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편을 잃었다. 몇 년 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마저 병으로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죽었다. 이후 그녀는 일부러 영안실 쪽으로 난 길로 다녔다. 고통은 끝났지 않았다.「토지」를 집필하던 중 암이 그녀를 찾아갔다. 서슬퍼런 한이 서린 「토지」 서판에 그녀는 말한다.    

  

“내 자신에게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박경리 선생은 당시 문단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글로 위로받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운명 같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글을 썼을 뿐이다. 그렇게 선생은 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열 명의 몫의 슬픔과 서러움을 견뎌내 그녀는 말한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3.

찌는 듯한 더위에 서늘함을 느꼈다. 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하는 일”이 아니던가. 이미 반 즈음은 글쟁이로 들어서서 알고 있다. 행복이 찾아올 때 그리 달갑지 만은 않고, 불행이 찾아올 때 그리 서글프지만은 않다. 되려, 행복이 찾아올 때 기묘한 슬픔을 느끼고 불행이 찾아올 때 기묘한 기쁨을 느낀다.      


 행복이 찾아올 때 마음 한편에서 슬픔을 느낀다. “좋은 글은 나오지 않겠구나.” 불행이 찾아올 때 마음 한 편으로 기쁨을 느낀다. “이제, 글을 쓸 수 있겠구나”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마음이 철부지 오만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정말 고통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퍼런 한이 서린, 그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을 때도, 글을 쓰며 고통과 마주할 수 있겠는가. 암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퇴원하자마자, 다시 글을 쓰며 그녀는 말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것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러운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녀를 발자취를 쫒으며 나는 작가로서 삶이 두려워졌다. 나는 정말 그렇게 쓸 수 있겠는가? 아니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언젠가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는 이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글을 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삶이에요.” 이미 쓸 수 없는 삶을 잃어버린 나는, 하동을 돌아 나오며, 서늘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서늘한 두려움이 자부심이 될 것이란 걸. 내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나를 견디게 해줄 자부심.      


 내가 박경리 선생만큼 좋은 글들을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오며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선생이 썼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나 역시 그 마음으로 글 한 줄 써내려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주제넘은 욕심이다. 서늘한 두려움을 가슴에 담고, 좋아하는 선배들의 길을 뒤따라 나도 간다. 나는 쓴다.       




작가의 이전글 '오해'를 잘 다루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