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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잘 다루는 법

'오해'로 오해를 넘어서기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오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해를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잘 다루어야 한다. ‘오해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오해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까? 아니다.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간은 거대한 자의식 덩어리 아닌가. 그런 존재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오해는 필연적이고 영원하다. 그러니 오해를 잘 다룬다는 것은 오해 자체가 없는 순수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오해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오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오해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갖가지 슬픔을 가져다주기 때문 아닌가. 오해는 그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문제다. 이렇게 오해에 관한 관점을 옮겨볼 수 있다면 이제 오해를 잘 다룰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보인다.       



1. ‘멸시’의 관계를 떠나기.


우선 멸시의 관점에서 오해를 다루는 법을 생각해보자. 멸시는 오해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오해. 이런 오해(멸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오해를 풀려고 한다. “사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일찍 퇴근 한 거예요.” “지갑은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스토킹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편지를 주려던 거였어요.” 오해(멸시)가 풀릴까? 부질없는 짓이다. 그들은 논리적 이유로 우리를 오해한 것이 아니다. 감정적 이유로 오해한 것인 까닭이다. 논리적 오해는 풀려도 정서적 오해(멸시)는 계속된다.    

  

 멸시라는 오해를 다루는 원론적 방법은 간명하다. 멸시(오해)하고 싶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 멸시(오해) 받고 싶지 않다면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된다. 멸시는 미움에서 오니까. 때로 원론적 이야기는 이토록 공허하다. 실제 삶에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미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네 현실에서는 불쑥 누군가가 미워지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지 않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멸시는 미움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 미움이 우리를 슬픔으로 내모는 것이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필요 없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할 때 더 오해가 쌓인다. 오해(멸시)를 풀려고 오해(멸시)를 되새김하는 동안 미움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점점 더 큰 슬픔에 빠진다. 멸시하는 쪽이든 멸시를 당하는 쪽이든, 그 관계를 떠나야한다. 그 떠남의 방법과 속도는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조절하면 될 일이다.        


 이것이 ‘자기비하’를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기비하가 무엇인가? 타인의 멸시의 시선이 내면화되어 나 자신을 멸시하게 되는 내면적 상태 아닌가. 우리가 멸시의 관계를 떠나면 그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할 일도 없다. 그러면 자연히 ‘자기비하’라는 오해를 할 일도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타인의 멸시를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자기비하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멸시의 관계를 떠나야 한다.       



2. ‘과대평가’의 관계를 향해 달려가기  

    

과대평가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과대평가도 오해다. 하지만 이 오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오해다. 이 오해는 우리를 구원하는 오해다. 오해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또 오해를 받았던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비만인 나를 덩치가 크다고 오해해 주었고, 나는 사랑하는 그 사람의 까만 얼굴을 섹시함으로 오해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오해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어디 있을까?      


 오해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과대평가하고 또 과대평가 받을 수 있는 관계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오해를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것이 오해를 잘 다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왜 그런가? 이제 우리는 네 가지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멸시’ ‘자기비하’ ‘과대평가’ ‘거만’ 이 중 멸시, 자기비하, 거만은 우리를 슬픔으로 내모는 오해다. 그리고 이런 오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멸시, 자기비하, 거만이라는 오해는 과대평가라는 오해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과대평가’에 빠진 사람은 누군가를 멸시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멸시를 능히 견뎌낼 수 있다. 과대평가에 빠졌다는 말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멸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에 빠진 이는 누군가의 멸시 정도는 웃으며 흘러버릴 수 있다. 그 멸시를 넘어설 정도로 과대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비하’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단 한 번도 ‘과대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깊은 사랑으로 ‘과대평가’ 받아본 이들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과대평가를 받아본 사람에게 ‘자기비하’는 없다. “계집애 주제에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아버지의 멸시가 남긴 자기비하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게 ‘과대평가’라는 오해는 ‘자기비하’라는 오해도 극복할 수 있다.

      

 ‘거만’ 역시 마찬가지다. ‘거만’은 잠시의 기쁨 뒤에 파멸의 슬픔을 주는 감정이다. ‘내가 못하는 건 없어’라는 거만은 파멸을 향해 치닫게 하는 감정이다. 마치 ‘수영에서 내가 모르는 건 없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익사를 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거만’이라는 오해 역시 ‘과대평가’로 극복할 수 있다. 거만은 유아적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내면적 상태다. 즉, 거만한 이들은 타자는 없고 자신만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나르시스트다. 


     

 이들은 언제 그 허황된 자기애를 멈출 수 있을까? 타자를 발견할 때다. 결코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는 타자. 바로 사랑하는 타자다. 그 타자는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는 타자다. 과대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거만’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거만이라는 자기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슬픔을 남기는 오해(멸시, 자기비하, 거만)는 오해(과대평가)로서 극복할 수 있다. 


 오해에 때문에 삶이 힘들 때, 오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는 더 큰 오해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차라리 과감하게 오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과대평가’라는 기쁨의 오해로 말이다. 노파심에서 할 말이 있다. 사랑이 끝나, ‘과대평가’마저 끝나면 어쩌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찬란했던 ‘과대평가’의 시간이 지났을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과대평가’를 받았던 그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 되어 있는 기적.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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