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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면?

메멘토 모리 VS 영원회귀

낡아버린,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삶을 잘 살기위해서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아무리 천박한 인간이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소비사회의 탈출을 돕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죽음을 진지하게 숙고해본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결코 오늘을 희생하거나 탕진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이미지다.


 죽음을 깊이 숙고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는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이것이 현명한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결코 오늘을 희생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다. 하지만 집요한 소비사회는 이제 죽음을 진지하게 사유할 여력마저 주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죽음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판다. 요즘 들어 부쩍 상조회사의 광고가 많아진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노인들에게 ‘죽어서까지 아이들에게 짊이 될 거냐!’라고 겁박하며 보험을 강권하는 것이 지금 소비사회의 흉측한 맨얼굴이다. 


 이제 죽음을 숙고하면서 오늘을 살아내고 소비사회를 탈출하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불편한 것은 그저 외면하려는 인간의 나약함과 비겁함, 그리고 그것을 기묘하게 이용하려는 자본주의 때문에 죽음은 이제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잃었다. 돈을 벌기 위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물은 적이 있다. “너 일주일 뒤에 죽어도 지금처럼 살래?” 그가 내게 돌린 답은 “죽을 때 죽더라도 돈은 벌어야지”였다. 이처럼 한동안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죽음’조차 소비사회가 상품으로 너무 자주 노출시킴으로서 이제 낡아버리게 된 게다.


니체의 영원회귀, 하루가 영원히 반복된다면?


소비사회의 탈출을 위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다. 탁월했던 철학자, 니체에게서 하나의 실마리를 얻어 보자.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이다.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삶은 원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것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혹시 영화 ‘사랑의 블랙홀’(1993년, 해롤드 래미스 감독, 빌 머레이 주연)이란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하루가 영원히 반복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다.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이미지는 이 영화와 닮아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쉽게 말하자면, 천 년 전의 삶이 있고, 지금 삶이 있고, 천년 후의 삶이 있을 때, 그 삶은 백년이란 사이클을 따라 무한히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묘수풀이는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결코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금 내가 40평대 아파트를 사기 위해 20년간 가기 싫은 직장을 꾸역꾸역 다니는 삶을 살았다면, 바로 그 순간 1,000 년 전에도 우리는 그 삶을 살았던 것이 되어버리고, 1,000년 후에도 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고 보면, 이 영원회귀란 이미지가 보통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이미지는 영원회귀에 비하면 귀엽고 순진해보일 정도다. 이번 생에서 알량한 그 아파트를 하나 사기위해 20년을 고생한 것도 죽으면 끝나버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영원회귀에 따르면 그 지긋지긋한 20년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지금 지나가는 사람에게 영문도 모른 채 따귀를 맞고 아무 말도 따져 묻지 못한다면, 그 분통 터지는 일은 영원히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나약함 역시 영원히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지금,오늘'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천 년 전,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 천 년 후에도 그 행동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넓은 집을 사느라, 좋은 차를 사느라, 비싼 옷을 사느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몇 십 년 동안 꾸역꾸역 하는 행동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니체는 이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의 삶에 존재하는 고뇌와 기쁨을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또 삶의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 '미래,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영원회귀라는 다소 공상적인 개념을 동원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소비사회의 탈출, 그것은 지금의 삶을 수단화하지 않고,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믿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선택하는 그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할 때, 소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오늘 후회스러운 행동 하나가 영원히 반복된다고 할 때, 당장 ‘지금·오늘’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내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 오늘’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믿자. 그렇게 소비사회로부터 탈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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