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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세 가지 암초

글쓰기의 앞 손을 위하여

‘앞 손’을 내지 못했던 이유


“앞 손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복싱 격언 중 하나다. 의아했다. 앞 손은 뒤 손보다 위력이 약하다. 뒤 손은 체중을 실어서 때릴 수 있기 때문에 위력적이다. 반면 앞 손은 체중이 잘 실리지 않는다. 그래서 앞 손은 가볍게 던져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왜 앞 손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걸까?      


 가벼운 스파링이라도 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부지런히 앞 손을 내야지만 상대의 흐름을 끊고 나의 흐름으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싱하며 앞 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 앎과 삶이 그리 쉽게 일치 되던가. 앞 손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도 앞 손을 생각만큼 많이 던지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느 스파링에서 상대가 거리를 좁혀오는데도 속수무책 가만히 있었다. 앞 손을 내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대가 내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 앞 손을 내었다가는 그대로 크로스 카운터펀치를 맞을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가볍게 던지는 앞 손조차 낼 수 없었다.      


 복싱을 오래하며 스파링에 익숙해졌다. 두렵지 않았다. 상대가 나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앞 손을 내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욕심’ 때문이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욕심이 들어찼다. 그 욕심으로 큰 한 방을 날리고 싶었다. 잔뜩 힘을 실은 뒷손으로 큰 한방을 노리느라 앞 손을 내지 못했다.      


 좌충우돌하던 스파링을 지나왔다. 두려움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앞 손을 내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체력’이었다. 스파링이 시작되면 앞 손을 부지런히 던졌다. 두렵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숨이 턱까지 차고 어깨는 천근만근이었다. ‘앞 손을 내야한다’ 머리로 생각할 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앞 손 잽을 반복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이유를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욕심’ 너머 ‘체력’ 문제에 도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작가와 복서, 글쓰기와 복싱

나는 작가다. 동시에 복서다. 작가로서 복싱을 하고, 복서로서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작가와 복서는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작가로 살다보니,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네들은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픈 직감이 든다. 그들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세 가지 암초를 넘어서지 못했다. 두려움, 욕심, 체력. 글을 쓴다는 것, 정말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행위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마치 내밀한 이야기를 잔뜩 써놓은 일기장을 세상 사람들 앞에 열어젖히는 일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늘 웅크리고 있느라 첫 ‘앞 줄’을 시작할 수도 없다. 두려움에 짓눌려 가벼운 ‘앞 손’을 낼 수 없다면 좋은 복싱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 두려움을 극복해도 다시 암초가 기다린다. 욕심. 글 꽤나 썼다는 사람은 욕심이 가득하다. 세상 사람들은 휘어잡는 매혹적인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 멋진 글을 써내야 한다는 그 욕심 때문에 가벼운 ‘앞 줄’을 시작하지 못한다. 멋진 K.O 욕심에 사로잡혀 가벼운 ‘앞 손’을 내지 못하면 좋은 복싱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두려움도 없고, 욕심을 내지도 않지만 좋은 글을 써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마지막 암초 때문이다.      



글쓰기의 '앞 손'을 위하여


체력이다. 누가 글을 정신으로 쓴다고 하는가. 글을 정신으로 쓴다고 말하는 이들은 진지하게 글을 써본 적 없는 이들이다. 글은 몸으로 쓴다. 그래서 글은 체력으로 쓴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체력이 있다. ‘살아낼 체력’과 ‘글 쓰는 체력’ 좋은 글은 온 몸으로 밀고 나가며 쓰는 글이다. 하여, 좋은 글을 쓰려면 삶을 잘 ‘살아낼 체력’이 있어야한다. 매일 새로운 ‘첫 날’을 잘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첫 날’을 ‘살아낼 체력’이 없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숨이 턱까지 차서 ‘앞 손’을 낼 수 없다면 좋은 복싱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려면 ‘글 쓰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 ‘첫 줄’을 시작할 체력. 첫 줄이 두 번째 줄을 밀어낼 체력. 그것을 이어나갈 수 있는 체력. 그것이 ‘글 쓰는 체력’이다. 좋은 글은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엉덩이 붙이고 책상에 앉아 어깨가 아플 때까지 일단 써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첫 줄’을 써내려갈 수 있는 ‘글 쓰는 체력’이 없다면 좋은 글은 애초에 요원하다. 어깨가 천근만근이어서 ‘앞 손’을 낼 수 없다면 좋은 복싱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는 비법은 간명하다. ‘앞 손’이면 된다. 나를 내보이는 것이 두려울 때, 두 눈을 질끈 감고 ‘앞 손’을 던지면 된다. 그렇게 던진 ‘앞 손’이 글을 쓸 담대함이 되어 돌아온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한 글에 욕심이 날 때, 소박한 마음으로 ‘앞 손’을 던지면 된다. 그렇게 던진 ‘앞 손’이 마음을 울리는 소박한 글이 되어 돌아온다. 지쳐서 살아낼 체력도, 쓸 체력도 없을 때, 이를 꽉 깨물고 ‘앞 손’을 던지면 된다. 그렇게 던진 ‘앞 손’이 살아낼, 쓸 체력이 되어 돌아온다. 좋은 글은 그렇게 ‘앞 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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