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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을 끝내며

“The meaning of the river flowing is not that all things are changing so that we cannot encounter them twice. But that some things stay the same only by changing.” 헤라클레이토스


한 여름에 시작했던 들뢰즈와의 만남이 찬바람이 불 때 즈음이 끝이 났다. 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알고 있었다. 주제 넘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들뢰즈의 깊고 방대한 사유를 대중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 내가 그의 사유를 대중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이해한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그 주제 넘는 짓을 시작했을까?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수업을 하며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내가 한 사람의 철학을 오해하고 오독한 것은 아닌지 늘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철학도, 글도, 수업도 어느 조직에 속해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다. 그렇게 홀로 지나온 길이었기에 그 걱정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들뢰즈를 읽고 또 가르치며 배웠던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차이와 반복」의 핵심은 무엇일까? ‘점’을 보지 말고 ‘선’을 보라는 것. ‘정역학’(고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동역학’(생성) 세계로 들어오라는 것. 그래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초대장이다. ‘being’이라는 익숙한 집을 나와 ‘becoming’이라는 여행(점이 아닌 선!)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 그 초대장을 받아들고 현기증이 나는 여행 끝에, ‘becoming’(선, 생성, 동역학) 세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알았다. 오해와 오독을 걱정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것을. 들뢰즈도, 철학도, 타인도,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오해와 오독은 가면이다. 가면은 언제나 허상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오해와 오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들뢰즈는 가면을 문제 삼지 않는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그 가면을 본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을 찾으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애초에 미리 존재하는 맨얼굴 같은 것은 없으니까. 세상은 '창조'(無→有) 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有→有)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무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시작하지 않는다우리는 결코 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니까 말이다. 


 들뢰즈는 존재의 의미를 가면과 전치(자리바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면과 전치는 ‘being’(점, 고정)으로서의 가면과 전치가 아니다. 들뢰즈가 말한 가면과 전치는 ‘becoming’(선, 생성)으로서의 가면과 전치다. 즉 ‘반복’을 만드는 ‘차이’ 그리고 ‘차이’ 나는 ‘반복’을 통해 끝임 없이 변해가는 가면과 전치. 그것이 존재의 진정한 의미다. 나는 이제 오해와 오독이  두렵지 않다. 들뢰즈를 어느 철학자를 오해하고 오독하는 것도, 타인이나 나 자신을 오해하고 오독하는 것도,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오해받고 오독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 오해와 오독은 가면이고 전치일 뿐이니까.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와 오독이 점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일 테다. 들뢰즈를, 철학을, 한 사람을 오해하고 오독한 채로 덮어 버리는 것.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테다. 내가 사랑하는 들뢰즈를, 철학을, 한 사람을 끊임없이 읽어 나갈 테다. 그렇게 ‘차이’ 나는 ‘반복’을, ‘반복’을 만드는 ‘차이’를 긍정해 나갈 테다. 그래서 나는 이제 들뢰즈를, 철학을, 한 사람을 오해하고 오독하는 것이 걱정되지도 두렵지도 않다. becoming의 세계를 긍정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차이’ 나는 ‘반복’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12주 간의 긴 수업을 들어주었던, 고마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들뢰즈도, 철학도, 한 사람도, 여러분 자신도 오해하거나 오독할 것을 두려하지 마세요.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오해와 오독을 멈추는 일이에요. 그렇게 ‘반복을 만드는 차이’를 긍정하고 ‘차이 나는 반복’을 멈추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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