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그 경박스러움 때문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것. 그것이 경박스러움이다. “나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아” 사랑했던 이가 해주었던 말이다. 스물 몇 살에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을 지금은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성능 좋은 카메라가 있다 해도 눈에 담긴 그 아름다운 장면을 남길 수 없다. 눈으로 보는 풍경과 카메라에 담긴 풍경은 전혀 다르다. 석양이 지는 그 아름다움은 눈과 마음에 둘 모두에 함께 담기는 까닭이다.
눈과 마음에 담지 않고 쉴 새 없이 셀카 셔터를 눌러대는 것은 경박스럽기만 할까. 게걸스럽기까지 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것이 경박스러움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가지려는 것은 게걸스러움이다. 맛을 음미하지 않고 음식을 쑤셔 넣는 것. 향을 음미하지 않고 차를 들이 붓는 것. 혼을 음미하지 않고 책을 읽어대는 것. 존재를 음미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대는 것. 게걸스러움이다.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가지려는 게걸스러움.
나는 이제 아름다움을 만나도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 담기보다 내 눈과 마음에 담고 싶다. 때가 되어 내 마음 어느 곳에 저장된 그 아릿한 장면을 꺼내볼 수 있게. 바짝 말라버린 디지털 사진은 결코 담을 수 없는 그 아릿함. 하지만 나는 가끔 경박스러워진다.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카메라에 담아보려 셔터를 누른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지만 남겨두고 온 이들을 위해 셔터를 눌러댄다.
그것은 경박스러움일지언정 게걸스러움은 아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것이지만,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아릿함. 그것을 주고 싶다. 아무리 잘 쓴 편지도 결국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는 것처럼, 사진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대어도 내 눈과 마음에 담긴 그 아름다움이 전해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경박스러움이다.
셔터를 눌러대며 알게 되었다. 경박스럽지 않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그 애절함이 없다면 사랑은 사랑 아닌 것일 테다. 조금 경박스러우면 어떤가. 내 마음이 온전히 다 전해지지 못하면 어떤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면 어떤가. 그것이 진짜 사랑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은 적어도 행복을 날조 하려는 게걸스러운 거짓-자기-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게걸스러움 너머 경박스러움으로, 그리고 다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겠다. 경박스러움 너머의 사랑은, 아름다움 뒤에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지 않는 것.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그 노을 보는 것. 사랑하는 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그것이 경박스러움 너머의 사랑이다. 그때 우리는 경박스럽게 셔터를 누르지 않아도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