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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을 찾는 이들에게

글감은 삶의 경계에 있다.

나의 두 가지 씀


“어떻게 매일 글 쓸거리가 있어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어느 분이 물었다. ‘매일 아침에 글을 쓴다.’는 나의 말에 그것이 궁금했나보다. 잊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싶어 했던, 하지만 작가될 수 있을지 몰랐던 시절 나도 그것이 궁금했었다.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질문보다 ‘무엇을 써야 하나?’를 질문하던 시간이 있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무엇인가를 쓰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시간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일 쓸 글감이 있지?’ 이 질문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미 나는 매일 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 질문은 낯선 질문이었다. 다시 물었다. 나는 어떻게 매일 글 쓸거리가 있는 것이지? 나에게 씀은 두 종류다. 의무로서의 씀과 기쁨으로서의 씀. 전자는 출판사와 출간을 약속한 글쓰기 혹은 제자들을 위한 글쓰기다. 때로 나는 그 글 때문에 매일 글을 쓴다. 그렇다면 나의 매일 글 쓸거리들은 의무로부터 나오는 것이냐? 아니다. 

    

 나는 출간과 제자를 위한 글 이외에도 쓴다. 그저 나의 기쁨을 위한 글들을 쓴다. 양으로 따지자면, 의무로서의 씀보다, 기쁨으로서의 씀이 훨씬 많다. 그 씀은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 전부터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아무런 약속도, 의무도 없는데 어떻게 매일 쓸 글감이 나오는 것일까? 이 질문보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약속도 의무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 쓰게 될까?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을 만날 때다.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올 때는 감정이 요동칠 때다. 사랑에 빠졌을 때 글을 쓰고 싶다. 이별에 맞닥뜨렸을 때 글을 쓰고 싶다. 이처럼, 그 감정의 요동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간에, 그 감정이 요동칠 때 글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글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요동으로 인해 촉발된 글감이 쓰고 싶다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글감은 삶의 경계에 있다.


이제 글 쓸거리가 없는 사람과 글 쓸거리가 있는 사람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글 쓸거리가 없는 사람은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과 마주치지 못한(않는) 사람이다. 늘 익숙하고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이들에게 글감은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쓰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다. 그렇다면, 글 쓸거리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을 만난(만나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요동치는 감정 속에 있는 사람이다.   

   

 매일 글 쓸거리가 있는 이들은 매일 요동치는 감정을 촉발하는 사건과 마주치는 이들이다. 그들은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그 감정을 촉발할  마주침 속에 있는 이들이다. 이제 알겠다. 집과 직장을 반복하는 이들은 매일 글감을 찾고, 매일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글감을 찾지 않는 이유를. 매일 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이들은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글감 중 어떤 것을 먼저 써야 할지 고민한다.     

 

 글감은 삶의 경계에 있다. ‘무엇을 써야 하지?’ 이 질문이 어느 순간 내게 사라진 이유를 알겠다. 글 쓰는 삶을 선택한 이후로 나는 늘 내게 주어진 삶의 경계까지 나아가려 했다. 직장인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철학자로, 철학자에서 복서로, 복서에서 다시 선생으로. 그 현기증 나는 여행 사이에 감정을 요동치게 할 수 많은 사건을 만났다.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이 써야 할 글감이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글은 삶이다. 이 말은 야박하게 짝이 없는 말이다. 글 쓸거리가 없다면, 살아내고 있는 꺼리가 없다는 말이니까. 삶이 멈춰있는데 글이 나올 리 만무하다. 삶을 안전한 곳에 박제해둔 채, 생동감이 있고 역동적인 글이 나올 리 만무하다. 훌륭한 문학 작품이 왜 전쟁의 시대에 그리도 많이 나왔는지 되물어야 한다. 어쩌면, 글감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투정일지 모르겠다. 삶을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고 싶고, 어제와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니까. 글감이 필요한가? 책상에서 일어나 과감하게 삶의 경계로 뛰어 들면 된다. 글감은 삶의 경계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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