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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사냥꾼들에게

좋은 문장을 발췌해두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비축해놓은 지식이 없다네. 내가 배우는 것은 모두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고 그 일을 하고 나면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다네.” 질 들뢰즈     


좋은 문장을 발췌해두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왜 이 많은 문장들을 발췌해두셨어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은 책을 읽는다. 왜 읽을까? 저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서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런 이들도 없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만난, 글을 쓰고 싶어 하는(혹은 작가를 지망하는) 이들의 속내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들은 대부분 사냥꾼이었다. 좋은 문장을 포획하고 싶어 하는 사냥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사람들에게 번뜩이는 통찰을 줄 문장을 찾는 사냥꾼.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그랬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 항상 메모장을 들고 책을 읽었다.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발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총을 들고 오감을 곤두세워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 이 문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겠구나!” “이 문장은 사람들을 번뜩이게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글을 만나게 되면 조바심이 나서 황급히 메모를 해둔다. 잊지 않고 내 글에 사용하기 위해서.


 그것은 게걸스러움이다. 게걸스러움이 무엇인가?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가지려는 마음 아닌가. ‘문장을 사냥한다.’는 것은 게걸스러움이다. 자신이 무슨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면서 일단 쑤셔 넣는 것 아닌가. 이것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무엇이든 입 속으로 쑤셔 넣는 게걸스러움과 무엇이 크게 다를까. 고백컨대, 한때 나는 그렇게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누군가의 문장을 쑤셔 넣었다.


머리가 기억하는 글, 가슴이 기억하는 글. 


다행스럽게도, 게걸스러움을 지나왔다. 나는 이제 문장을 발췌하지 않는다. 좋은 문장을 만나도 음미하거나 감탄하며 읽을 뿐, 어딘가에 특별히 기록해두지 않는다. 좋은 문장들을 만날 때 그저 음미하거나 감탄하면 된다. 그것이 진짜 좋은 문장이었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말해준다. 아무리 좋은 문장을 만나도 발췌할 필요 없다. 마음에 담긴 문장은 언제든 나온다.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까닭이다. 

    

“나는 비축해놓은 지식이 없다네. 내가 배우는 것은 모두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고 그 일을 하고 나면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다네. 그래서 십 년 정도 지나고 나서 내가 만약 비슷한 것이나 같은 주제를 다시 다뤄야 하게 되면 나는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네. 하지만 특정한 경우는 예외라네. 스피노자는 항상 기억을 하고 있다네. 그에 대한 것은 잊지 않는다네.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하는 것이거든.” 잘 들뢰즈    


 ‘질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있다. 현대철학의 최고봉이라 불릴 만큼, 그의 철학은 깊고 방대하다. 그의 글은 그의 철학만큼이나 매혹적이다. 그런 그는 지식을 비축 해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리 매혹적인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일까? 잊어버린 것들이 필요하다면 0부터 다시 공부하기 때문이다. 또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잊지 않는 것이 있다.


 ‘스피노자’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만큼은 결코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히지 않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하는 것”은 결코 잊히는 법이 없다. 좋은 문장 역시 그렇다. 시간이 지나도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남아 있는 문장만이 진짜 좋은 문장이다. 진짜 좋은 문장은 마음에 새겨져 긴 시간 기억 된다.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잊지 않으려 조바심을 내며 발췌할 필요 없다.

      

내가 문장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이 나를 사냥하는 것이다.  

   

그런 게걸스러운 발췌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만나면 좋은 차를 음미하듯 조금 천천히 읽으며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억하려 애쓸 필요 없다.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나가야 할 때 그것이 정말 필요하다면 다시 0부터 시작하면 된다. 또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진정으로 좋은 문장이었다면 0부터 시작할 필요조차 없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담긴 좋은 문장은 결코 잊히는 법이 없이 없으니까.


 좋은 글은 이것저것 좋은 문장들을 발췌해서 쓰는 짜깁기 글이 아니다. 기억나지 않는, 하지만 언젠가 읽은, 마음에 남은 문장으로 쓰는 글. 그 아릿한 문장의 흔적들로 쓰는 글이 좋은 글이다. 사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문장이 아니다. 나의 문장이다. 가슴에 아릿한 흔적으로 남은 문장은 내 삶이 된다. 그렇게 내 삶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글이다. 삶이 곧 글이니까. 그런 좋은 글은 사냥하듯 발췌한 문장으로 결코 쓸 수 없다.


 내가 문장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이 나를 사냥하는 것이다. 이것이 글-씀-삶의 진실이다. 글을 정말 사랑한다면, 씀을 정말 사랑한다면 문장을 사냥하려 해서는 안 된다. 벌거벗은 채로 문장 앞에 서있어야 한다. 그렇게 문장이 나를 사냥하도록 두어야 한다. 어느 순간, 어느 문장에 내가 완전히 포획 당할 때까지 기다려 한다. 그 기다림 속에 작가의 잠재성이 탄생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머리로 기억된 것은 잊고, 가슴으로 기억된 것을 남겨두는 긴 기다림. 글쟁이는 언제나 조바심을 경계해야 한다. 게걸스런 발췌, 메모들은 언제나 조바심의 결과들 아니었던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조바심으로 쓸 수 있는 글은, 조바심 나고 게걸스러운 글 뿐이다. 날을 세운 채 다가오는 문장을 벌거벗은 심정으로 기다리는 마음. 그것이 없다면 좋은 글은 애초에 요원하다. 작가의 탄생은 언제나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소박하게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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