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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자존심'

비루함을 너머, 근성을 너머, 자존감으로.

조국은 법무부 장관을 사퇴했다. 아쉬워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검찰개혁의 다음 행보 역시 터주었기 때문이다. 국회에 남은 희망은 없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니, 이제 검찰개혁은 우리(시민)의 몫으로 남겨졌다. 


 검찰개혁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시민)가 권력자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더 중요하다. 대의민주주의는 일종의 환상이다. 우리가 권력자를 선출하지만, 실제로 권력은 (우리의 의지와 다른 선택을 하는)권력자에 의해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목이 중요하다. 권력자를 판단하는 안목. 검찰개혁도 이 문제의 파생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검찰개혁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윤석열 총장이다. 그는 어떻게 검찰총장이 되었나? 형식상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했다. 하지만 그 형식 밑에는 우리의 암묵적 지지가 있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에 우리는 윤석열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 지지는, 권력자가 될 사람으로서 충분한 판단 이후에 형성된 지지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조국 사태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테다. 우리는 윤석열의 어느 지점에 환호와 지지를 보냈던 것일까? 아마 그의 ‘자존심’일 테다. 상관의 지시가 부당하다면, 그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존심. 상대가 국가 최고 권력자(박근혜)라도, 국기를 문란케 하는 잘못이 있다면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수사하는 자존심. 이런 자존심이 있는 검사에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윤석열의 아니, 잠정적 권력자의 자존심에 대해서 되돌아 볼 때다.    


 


세 가지 자존심

세 가지 자존심이 있다. 자존심이 쎈 복서를 세 명 있다. A, B, C라 하자. A는 자존심이 쎄다. 강한 상대와 스파링이나 시합은 미리 피한다. 자존심이 없어서 피하는 게 아니다. 자존심이 너무 쎄서 그런 것이다. 자존심이 너무 쎄기에 자존심이 상할 일은 애초에 피하려는 것이다. 이런 자존심은 비루함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이 상할 일을 미리 피하는 비루함.     


 B도 자존심이 쎄다. 강한 상대와 스파링이나 시합도 피하지 않는다. 그걸 피하는 게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더라도, 다시 연습해서 싸운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다. 강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존심은 근성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A와 같은 자존심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힘이 있는 이에게 붙어서 자존심 상할 일을 미리 피하려는 비루한 이들.      


 B와 같은 사람은 드물다. 상대가 아무리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결코 굽히지 않고 악착같이 싸워나가는 이들. 그런 이들은 드물다. 우리는 대체로 A와 같은 소시민들이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B에 대한 동경이 있다. 우리 역시 B처럼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은근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B다. 그는 결코 비루하지 않다. 근성으로서 자존심이 있다. 윤석열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었던 대학시절, 윤석열은 광주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에게 모의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했을 정도니까. (이 사건 후에 윤석열은 한 동안 도망을 다녀야 했다.)   


 윤석열은 근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는, 드문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근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면, 잠정적 권력자로서 지지해도 좋은 것일까? 다시 B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느 날, 프로 복서 지망생들이 스파링을 하기 위해 체육관으로 찾아왔다. 스파링이 시작되었고 호기로운 프로 지망생은 있는 힘껏 B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명확한 실력 차에도 불구하고 B는 큰 펀치를 몇 대 맞았다. B는 그 프로지망생을 죽기 살기로 팼다. 심지어 코치가 그만하라는 소리에도 두 대를 더 후려갈기고 나서야 공격을 멈추었다. 프로 지망생은 코피와 고막이 터졌다.      



근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는 권력자는 훌륭한가?


B는 자존심이 쎄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그 ‘누구’에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없다. 누구라도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악착같이 공격해서 짓밟아 놓는다. 우리는 그것이 강자일 때 환호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B는 약자도 똑같이 대한다. 나의 자존심을 건들면 코피와 고막 정도는 작살을 내야 한다. 그것이 B에게는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윤석열의 모습 아닌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쎈 조직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검찰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의 수장이 윤석열이다.      


 그런 그가 일개 기자를 고소했다. (신문사를 고소한 것이 아니라 기자 개인을 고소했다.) 그 기자의 제보(별장 접대 의혹)가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현직 검찰 총장이 일개 기자 한 명을 고소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고소가 국민의 알 권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제한하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윤석열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상대가 강자든 약자든 고려하지 않는 사람.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인 사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은 코피가 터지고 고막이 찢어질 때까지 후려갈긴다. 그것이 링(법)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윤석열만 그런가. 열혈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변절을 보라. 그들은 변절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군바리(박정희, 전두환) 주제에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기에 군사정권과 맞서 싸운 것이다. 이미 운동권 학생이었을 시절, 그들은 이미 민중들과도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던 이들이다. 다만 그때는 민중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를 잠정적 권력자로 지지해야 하는가?      



비루함과 근성 너머, 자존감


C다. 그는 복싱을 잘한다. 그리고 자존심도 쎄다. 하지만 프로 지망생이 쎄게 때린다고 해도 참는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맞으면 화가 난다. 또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존심도 상한다. 하지만 살기를 가득 실은 펀치를 쏟아붓지 않는다. 상대가 다치지 않게 배려하면서 한다. 그리고 스파링이 끝난 뒤 지망생들에게 부족한 점들을 차분히 말해준다. 그는 진짜 자존심이 쎈 것이다. 이 즈음 되면, 그것은 자존감이다. 자존심이 극한으로 쎄지면 자존감이 된다.      


 자존감은 자신과 세상을 성찰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존심이 극한에 이르면 자존심을 굽힐 수 있게 된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타인과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근성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힐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힘이 강한지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펀치 하나, 말 한마디가 타인과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는 까닭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말 그대로 민民이 주인主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권력을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런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권력자를 지지해야 한다. 그때 안목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힘을 줄 것인지. A, B 같은 사람들은 곤란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C와 같은 사람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 즈음은 기꺼이 굽힐 수 있는 사람. 비루함과 근성 너머 자존감. 그런 자존감이 있는 정치인을 지지 해야 한다. 헛발질은 이쯤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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