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선생은 할 짓이 못 된다. 학생들의 아픈 이야기에,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아픔의 폭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낫다. 하지만 떄로 내 아픔의 폭 바깥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도 선생은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어야 한다. 같이 주저 앉아 울어버려서는 안된다. 나무처럼 그 자리에 그저 서있어야 한다. 어느 학생의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누구에게나 있었을 수 있는, 하지만 운좋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곱씹다, 몇 번을 울었을까. 그 눈물은 내가 그 제자에게 해줄 말이 없어서 나온 눈물이었다. 나는 그 제자의 아픔을 모른다. 얼마나 아팠을지 알 수 없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었을까?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었을까? 모르겠다.
나의 아픔은, 제자가 얼마나 아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느낀 아픔이다. 그것이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나보다. 아파보지 않은 상처에 대해 말하는 것. 이보다 더 무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무례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아프다. 마음과 몸 모두 아프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아픔은 세 겹의 아픔이니까.
제자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넘겨받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이 제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마음 아프다. 또 혹여 나의 주제 넘는 이야기에 제자가 상처받지 않았을까 가슴 조리느라 마음이 아프다. 그 세 겹의 마음의 아픔에 몸이 아프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테다.
마음이 아픈 것인지, 배가 아픈 건지. 아파서 잠 못 드는 밤. 겨우, 겨우, 제자에게 편지 한통을 써 보내고 눕는다. 감은 눈 사이로 흐른 물방울이 귀에 닿을 때 즈음. 다시 한 방울이 맺힌다. 그 편지가 다시 세 겹의 아픔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물방울이 귀를 지나 베개를 적실 때 즈음. 안도감에 겨우, 겨우 잠이 든다. 제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꽤나 아팠다는 안도감.
아파본 적 없는 상처에 대해 말하는 것. 그 주제 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지는 아픔을 감당하며 사는 것. 그것이 선생의 역할이다. 아픔을 이야기한 제자에게 바란다. "남겨진 아픔이 조금이라도 옅어졌기를" 제자의 아픔 다시 기억하며 나에게 바란다. “조금이라도 더 선생질을 버텨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