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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폭력이 탄생할 때.

“아빠, 왜 요즘 자꾸 예빈(둘째)이한테 공부하라고 해?”

 

첫째가 해맑게 질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도 시키지도 않는다.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공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이 하고 싶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왜 둘째에게 은근히 공부를 강요했던 걸까?     


 아내는 아이들이 공부하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계속 스마트폰만 보거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폭력이다. 자신의 불안과 조바심 때문에 저지르는 폭력. 억압은 폭력이다. 가정이라는 이름으의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기 때문이다. 

      

 어떤 억압이든, 억압은 폭력이고, 폭력은 아이들을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닫게 한다. 때리고 소리 지르는 노골적인 억압만큼, 은근히 강요하고 겁박하는 억압도 문제다. 아니 어쩌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저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후자, 즉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은 그 저항마저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둘째 은근히 공부를 강요했던 걸까? 그건 아이들과 상관이 없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평균적인 시선에서 나는 최악의 남편일 테다. 글을 쓰고 수업을 하지만 돈은 크게 못 번다. 그뿐인가? 그 돈도 못 버는 글쓰기와 수업을 한다고,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느라 아이들 교육을 크게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나도 안다. 내가 좋은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서,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사람이 미안하면 뭐라도 해주고 싶은 법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은 법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돈'과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후자라도 해주고 싶었던 게다. 문제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을 아내의 방식으로 해주고 싶었던 게다. 매일 정해진 수학, 영어 숙제를 아이가 싫어하더라도, 잘 달래가며, 은근히 강요하며, 안되면 겁박해가면서 교육하는 방식.

     

 나는 비겁했다. 아내에 대한 부채감을 덜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아이들에게 은근한 폭력을 자행했다.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첫째가 발견했던 것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둘째에게 은근히 공부를 강요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게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당황의 감정이 지나간 후, 이내 창피했고, 부끄러웠다. 아이들을 이용해, 아내에 대한 부채감을 덜려는 내가 한 없이 창피했고 부끄러웠다


 빚은 빌린 사람에게 갚으면 된다. 엉뚱한 사람에게 갚아서는 안 된다. 그 단순한 사실을 더 늦기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때로 아이에게 배운다. 첫째에게 고맙다. 아내에 대한 부채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둘의 문제일 뿐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창피한 일은 이제 하지 않을 테다. 빚진 것은 빌린 이에게 갚으면 된다. 아이는 아이들의 삶을 살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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