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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 행복을 찍을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은 행복을 담지 못한다. 


언제 카메라 셔터를 누를까? 우리는 행복한 장면을 만날 때 핸드폰을 꺼내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로 행복한 순간을 찍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바람처럼, 카메라로 행복을 찍을 수 있을까? 언뜻 그런 것도 같다. 과거 행복했던 순간의 사진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게 될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카메라로 찍은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진에 남겨져 있는 것은 '기억'이지 '행복'이 아니다. 


 처음으로 바다에 가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드넓은 바다에 매료되어 연신을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그 사진을 보며 미소 지을 것이다. 그 사진에 ‘행복한 장면’(바다)이 찍혀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가 미소 지었던 이유는 그 사진에 행복했던 ‘기억’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가 있더라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찍을 수 없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폭포 앞에 서 있다. 그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사진은 분명 그 장대한 폭포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폭포와 그 폭포를 담은 사진을 번갈아서 보면 무언가 다르다. 실제 폭포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있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이 사진에는 없다. 이는, 카메라로 행복한(즐거운, 설레는, 경이로운) 장면을 찍을 수는 없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증이 생긴다. “왜 카메라로 행복한 장면을 찍을 수 없을까?” 



발터 벤야민 ‘원본’과 ‘복제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 있다. 그는「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원본과 복제품에 관한 통찰을 전해준다. 복사기나 카메라가 없던 과거에는 고흐의 그림은 원본 하나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수백만 장의 고흐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복제기술(복사기, 카메라 등등)이 발전함에 따라, 고흐의 그림을 얼마든지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성능 좋은 카메라나 복사기로 고흐의 그림을 똑같이 복제한다고 해보자. 그럼 그것은 고흐의 그림인가? 아닌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원본과 복제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에 산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시대에 원본과 복제품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했던 철학자다. 그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원본과 복제품이 모호해진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예술적 조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왜 카메라로는 행복한 장면을 찍을 수 없을까?’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원본-복제품’에 관한 논의다. 행복한 장면은 ‘원본’이고, 그것을 찍은 사진은 ‘복제품’인 까닭이다. 카메라로 행복한 장면을 찍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벤야민은 이렇게 답해줄 테다. ‘사진에는 아우라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고흐가 그린 그림’(원본)과 ‘고흐의 그림을 복제한 그림’(복제품)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 차이가 ‘아우라’에 있다고 말한다. ‘아우라’가 무엇일까?     

 


아우라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적인 대상의 아우라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중략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다그 순간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이런 현상이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산등성이가 만들어낸 그늘과, 한들거리는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반짝 거리는 그늘 속에 있다. 그 아름다운 장면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 속에서 산과 나뭇가지가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독특한 분위기가 바로 산과 나뭇가지의 ‘아우라’다. 우리를 압도하는 장대한 폭포 역시 그런 아우라(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즉,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빠져들게 될 수밖에 없는 사물·경치를 만나게 될 때, 그것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우라는 역설적이다. 아우라를 느낄 때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고 한다. 하지만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을 때 아우라는 사라진다. 내 눈 앞에 있는 장대한 폭포에는 아우라가 있지만 그것을 찍은 사진에는 아우리가 없다. 사진에는 폭포의 모든 것이 그대로 담겨 있지만 오직 하나만은 빠져 있다. 아우라. 벤야민은 원본과 복제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아우라에 있다고 말한다. 



아우라의 본질은 ‘지금-여기’에


아우라는 우리를 매혹시켜 빠져들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다. 이 아우라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긴 시간 좋아했던 연예인을 만났다고 해보자. 넋을 놓고 그 사람을 바라 볼 것이다. 그 연예인에게서 아우라를 느낀 까닭이다. 그 아우라는 어디서 왔을까? 당연히 그 연예인에게서 왔다. 그렇다면 그의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에서 아우라를 느낀 것일까?   

   

 아니다. 만약 그 연예인의 외모와 옷차림에서 아우라를 느낀 것이라면, 화면 속의 연예인에게서도 아우라를 느껴야 한다. 화면 속에서도 그의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을 그대로 일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연예인을 보았을 때만 아우라를 느끼게 된다. 그 연예인의 아우라는 그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의 외모나 옷차림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럼 그 연예인의 아우라는 어디서 온 것일까?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은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아우라의 본질은 ‘지금-여기’에 있다. 그 연예인의 아우라는 그의 외모나 옷차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연예인이 ‘지금-여기’ 내 눈앞에 “일회적 현존재”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 바로 여기서만 일회적으로 그 연예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예인은 ‘원본’이고, 화면 속 연예인은 ‘복제품’이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원본이 갖고 있는 ‘지금-여기’에 있는 일회적 현존재다. ‘아우라’는 ‘지금-여기’에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대한 폭포와 그것을 카메라로 똑같이 복제해도 무엇인가 다르다. 이제 다른 그 무엇이 무엇인지 알겠다. '아우라'다. 사진 속 폭포에 아우라가 빠져 있다. 폭포의 경이로움은 아우라다. 그 아우라는 폭포의 그 장대함을 ‘지금-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일회적 현존재에서 온다. 사진으로 그것을 찍는 순간 아우라가 사라져 버리는 이유 역시 알 수 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 ‘지금-여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폭포는 ‘영원-거기’에서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우라가 있는 ‘지금-여기’에 머물기

     

아우라는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남겨 두고 싶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카메라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는 더 많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 내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을 음미하기보다 황급히 스마트폰을 찾는다. 그렇게 행복을 줄 아우라의 순간은 지나가버린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시대에서 아우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벤야민은 예술작품(원본)이 복제 가능해질수록 아우라는 위축된다고 말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카메라를 생각해보라. 아우라는 ‘지금-여기’에 있다. 그 ‘지금-여기’를 훼손하고 위축시키는 것이 바로 카메라다. 카메라는 ‘지금’을 ‘영원’으로, ‘여기’를 ‘거기’로 바꿔놓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오월에 핀 예쁜 꽃에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그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이유는 ‘지금-여기’에 그 꽃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순간, 몰입되어 있는 ‘지금-여기’가 깨지고 만다. 그렇게 우리의 행복도 깨진다.

     

 아우라가 우리를 찾아올 때 해야 할 일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아니다. 그 아우라를 그저 음미하면 된다. 장대한 폭포든, 오월에 핀 꽃이든, 우연히 만난 연예인이든, 우리를 매혹시킬 대상이 찾아오면 하던 것을 멈추고 ‘지금-여기’에서 잠시 머물면 된다. 그렇게 그 순간의 행복을 충분히 음미하면 된다. 행복이 행복한 이유는, 그 행복이 ‘지금-여기’에 잠시 머물기 때문이다.  

    

 행복은 일회적이어서 희소하기에 행복한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본질이다. 우리는 그 행복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에 셔터를 누르면서 행복을 훼손하는 것일 테다. 사진으로 행복을 박제해 두고 싶은 어리석은 바람으로 우리는 행복에서 멀어져 간다. 행복한 장면이 찾아왔을 때,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는 방법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멈추고 그 행복의 순간에 머무는 일이다. 행복은 ‘지금-여기’에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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