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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댐, 최소한의 건강함

“선생님, 전화통화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있나. 밤, 12시 30분이 넘었는데. 평소 연락을 잘하지 않는 제자라,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과 초조,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울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대략 내용은 삶이 너무 힘들다는, 이제 혼자 남겨진 것 같다는, 그래서 외로움이 너무 두렵고 불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내리 30분을 꺼이꺼이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안다. 제자는 ‘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그래서 별 말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었다. 제자는 단독적인 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 초조, 걱정, 두려움을 이야기할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힘들 때 누군가에게 징징대야만 겨우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미숙한 아이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통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법을 모른 체 징징대는 아이.

     

 30분 통화가 끝나고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하기 너머로 전해졌던 제자의 불안, 초조,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 나의 불안, 초조, 걱정, 두려움의 시간들이. 퇴근 후에 텅 빈 원룸에 들어서 불도 켜지 않고 혼자 울었던 시간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세상,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들어 간 시간들. 그렇게 혼자 남겨진 시간들. 불안했고, 초조했고, 두려웠다. 죽음이 희망처럼 보였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나의 긴 우울증은 시작되었다.



 그때 나와 지금의 제자가 겹쳐지나갔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제자보다 더 나았을까? 그때의 나도, 지금의 제자도 ‘고통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제자가 더 건강하다. 그 제자는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법’은 몰라도, ‘징징대는 법’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둘 다 몰랐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법'도, '징징대는 법'도 몰라서 서서히 자신을 죽여가고 있었던 게다.

      

 제자는 최소의 건강함이 있다. 징징댐은 건강함이다. 최소한의 건강함. 죽음을 희망으로 여기지 않는 건강함.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의 건강함. 그제 서야,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제자는 최소한의 건강함은 유지하고 있으니까. 내게 전화해서 한 바탕 울고 불며 징징댄 후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을 테다. 그렇게 그 제자는 죽음을 희망으로 여기지 않을 테고, 언젠가는 묵묵히 혼자 견디는 법도 익혀갈 테다.

      

 징징대도 된다. 일단 자신부터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늪 같은 어두운 감정에 빠져 들어 갈 때는, 타인을 배려하기 보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 그런 최소한의 건강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최소한의 건강함이 없다면, 아름다운 삶도, 성숙한 삶도 없다. 일단 살아야 아름다워지던, 성숙해지던 할 것 아닌가. 징징대도 된다. 그것은 건강함의 증표다.      


 제자의 징징댐을 칭찬해주고 싶다. 자정이 넘은 시간, 선생이야 잠을 자고 있건 말건, 30분 동안 징징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최소한의 건강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단 제자만의 이야기일까? ‘고통을 묵묵히 견디는 법’을 모른 체, 고통의 시간을 맞이한 사람들은 되돌아 볼 일이다. 자신의 최소한의 건강함이 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나는 ‘징징대는 법’ 조차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를 조금씩 죽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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