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까요?

움베르또 마뚜라나 ‘관찰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

     

“어렸을 때 공부해야 돼!” “방은 항상 깨끗해야 하는 거야!” “게임은 나쁜 거야!” “대학은 꼭 가야 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흔하다. 부모나 선생, 선배 혹은 친구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위축되고 답답하다. 특히나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까?         


 답은 어렵지 않다.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하나 같이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의심이 없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 그 확신이 바로 폭력적인 강요로 이어지는 이유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으니, 내 생각을 강요하는 일은 당연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그것은 선의일지도 모르겠다.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선의.     

 


마뚜라나의 ‘관찰자’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다. 본질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질문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은 어디서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R. Maturana에게 들어보자. 마뚜라나라면, ‘나의 생각의 옳다!’는 확신은 ‘관찰자’의 오류로부터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뚜라나의 ‘관찰자’란 무엇일까?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관찰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인간 자신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 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마뚜라나는 ‘관찰자’는 지식, 인간, 세계, 우주 등 모든 것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즉, ‘관찰자’가 있기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는 세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관찰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뚜라나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관찰하기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관찰자의 소멸, 즉 관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고 그 강아지만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마뚜라나는 그 강아지가 죽음과 동시에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 놀라운 인식의 전환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언젠가 아들과 곤충박물관에 놀러간 적이 있다. 거기에는 곤충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체험해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아들은 그 망원경을 보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아빠, 곤충들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사나봐”   


   

‘관찰자’의 세계들

     

그 망원경을 통해 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다. 초점이 안 맞아 흐릿해 보이거나 대상이 여러 개로 보이기도 한다. 아들은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본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곤충이 본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그 당혹감 앞에 아들은 곤충이 사는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결론 내린 셈이었다. 바로 이 결론이 마뚜라나의 주장이다. 동물이 보는 세상이 있고, 곤충이 보는 세상이 있고, 인간이 보는 세상이 있다.  


 이는 모두 다른 세상이다. 인간이 보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결론내릴 어떠한 근거도 없다. ‘인간-동물-곤충’의 관계만 그런가. ‘인간-인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세계가 구성된다. 부자인 삶을 관찰했던 사람과 가난한 삶을 관찰했던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같은 세계에 살지 않는다.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이 부자인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관찰자로 있었던 각자의 세상에 산다.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강요, 그리고 그 강요의 토대가 되는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은 ‘관찰자’의 오류로부터 온다. 관찰자의 오류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관찰자’로 있었기에 존재했던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는 판단이다. 곤충 망원경을 보고, ‘곤충은 세상을 잘못보고 있구나!’라는 판단 말이다. 세상은 유일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관찰자의 수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마뚜라나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강요의 형식으로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와 관련해서그것이 존재한다는게다가 명백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관찰자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유일한 세상이 존재하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관찰자들의 각자의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 곤충은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관찰한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 판단 내린다. 폭력적 강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강요는 ‘나는 옳다!’는 확신에서 오고, 그 확신은 ‘내가 본 세상이 유일하다’는 생각에 기초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

 

‘관찰자의 오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강요의 문제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는 이 관찰자의 오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마뚜라나는 진정한 관찰자와 관찰하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관찰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관찰자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중략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먼저, 마뚜라나는 아무 고심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을 관찰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우리들 삶의 대부분을 관찰자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관찰자란 자신이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 것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눈으로 세상을 관찰할 때 관찰되는 대상에만 빠져 있지 말고, 지금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중이라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관찰하기다. 그것은 달리 말해, 곤충의 관찰과 인간의 관찰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이고, 관찰자는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이다. 자기성찰이 무엇인가?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 자체에 빠져 들지 않고 그 행동을 거리 두어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아닌가. 진정한 관찰자가 되면, 폭력적으로 강요하기 어렵다.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공부해야 돼!”라는 강요는 어렸을 때 공부하지 않아서 불행해진 삶의 관찰이 구성한 세계일뿐이다. “게임은 나쁜 거야!”라는 강요는 게임을 해서 불행해진 삶의 관찰이 구성한 세계일뿐이다.  



'있음'은 '함'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모두 진정한 관찰하기가 아니다. 자신이 관찰했던 대상(공부, 게임)에 매몰되어 있을 뿐, 자신이 대상(공부, 게임)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 ‘관찰하기’가 가능해지면 강요는 무의미하다. ‘내가 옳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옳을 수 있지만, 그 옳음은 내 세계의 옳음이지 다른 세계의 옮음은 아닐 수 있음을 안다. 관찰자는 그 사실을 안다.

      

 강요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걸어갈 수 있을까? 마뚜라나에 따르면, 세상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먼저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세상이 구성된다는 말 아닌가. 강요의 다그침에 불안해하거나 주눅들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관찰자로서 관찰하기 해나가면 된다. 그때 우리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강요에 흔들리고 불안할 때 마뚜라나의 이 말을 되새길 시간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놓는다는 것입니다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움베르또 마뚜라나     

작가의 이전글 콤플렉스, -되기, 들뢰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