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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되기, 들뢰즈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괴롭히는 콤플렉스

    

‘작은 키’, ‘뚱뚱함’, ‘엄마(아빠) 없는 가족’, ‘가난함’ 흔한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는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검은 점이 몇 개 찍힌 하얀 백지가 있다. 그 검은 점이 우리의 어둠이고 부정적인 면이다. 즉, 콤플렉스다. 그리고 드넓은 하얀 여백은 우리의 밝음이고 긍정적인 면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을까? 몇 개의 검은 점에만 계속 머문다. 그것을 보느라, 정작 그 넓은 하얀 여백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콤플렉스가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방식이다. 몇 개의 작은 검은 점에 집중하느라, 정작 그 넓은 밝고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간명하다. 그 검은 점에서 시선을 떼고 하얀 여백을 보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검은 점(콤플렉스)을 보지 말라!’고 말하면 할수록 그 검은 점에 더욱 신경이 쏠리게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검은 점에서 시선을 뗄 수 있을까? 즉, 이 질문이 중요하다.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되기(becoming)’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 들뢰즈’에게 들어보자.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고 그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줄까? ‘-되기(becoming)’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해 줄 테다. ‘-되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지배적이고, 관성적이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지금의 (지배적, 관성적, 익숙한)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되기’를 통해 콤플렉스는 극복 가능하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왜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성적이고 익숙한 ‘나’에 계속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지배적이고 관성적이며 익숙한 ‘나’에서 벗어나 다른 ‘나-되기’가 되면 어떻게 될까? 작은 키는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니다. “키 좀 작은 게 뭐 어때서?”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된다.     



‘다른 나-되기’ 


이제 다시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다른 나-되기’가 가능할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콤플렉스였던 것은 계속 콤플렉스로 남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가난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평생을 돈에 매인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하지만 이전의 ‘나’를 벗어나 다른 ‘나-되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콤플렉스는 극복된다. 현재의 ‘나(-되기)’는 콤플렉스에 지배되던 과거의 ‘나’가 아니니까 말이다.


 작가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지배적이고 관성적이고 익숙한 나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나’(-되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콤플렉스도 극복했다. 그의 콤플렉스는 나쁜 머리였다.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늘 노심초사했고, 무슨 일을 시작하든 나쁜 머리 때문에 주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는 머리 나쁜 작가야” 농담 삼아 말할 정도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는 어떻게 과거의 ‘나’를 벗어나 ‘나-되기’가 가능했을까?


‘강도’intension


‘-되기’는 그냥 되지 않는다. 힘이 필요하다. 들뢰즈는 그 힘을 ‘강도强度’라고 표현한다. 강도는 말 그대로 강한 정도를 의미한다. 즉 세기(힘)다. 이제 우리가 콤플렉스에 집착하는 ‘나’에서 벗어나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비밀이 보인다. ‘-되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 즉 “‘강도’를 어떻게 발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답만 찾으면 된다. 그 힘으로 우리는 과거의 ‘나’와 다른 ‘나-되기’가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강도는 현실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 규정자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에 따르면, 강도는 어떤 존재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아직 꽃이 아니다. 하지만 씨앗은 꽃으로 언젠가 ‘현실화’된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어떤 힘이 바로 ‘강도’다. 마찬가지로,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나’에서 벗어나 콤플렉스를 극복한 ‘나-되기’가 현실화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강도’다. 이제 그 ‘강도’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강도'를 만드는 ‘차이’


강도는 차이다. (중략) (중략강도량은 즉자적으로 비동등한 것을 포괄한다강도량은 양의 차이를 나타낸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들뢰즈는 ‘강도’가 ‘차이’라고 말한다. 의아하다. ‘강도’는 어떤 세기, 즉 힘인데 그것이 ‘차이’(이것과 저것은 다르다)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층 건물 옥상 난간에 돌멩이 하나가 올려져있다. 그때 그 돌멩이는 위치에너지라는 ‘강도’(세기,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강도’(위치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 높이다. 3층이라는 높이 때문에 발생한 위치에너지가 바로 그 돌멩이가 갖고 있는 힘, 즉 강도다. 그럼 이제 다시 묻자. 그 높이는 어디서 왔을까? 


 바로 ‘차이’다. ‘땅바닥-3층’ ‘차이’ 그 자체가 바로 높이 아닌가. 그러니 ‘강도’는 바로 ‘차이’다.  “강도량은 즉자적으로 비동등한 것을 포괄한다”는 말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땅바닥’과 ‘3층’은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그 비동등한 것을 포함하지 않으면 강도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둘을 포함해야 높이가 발생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강도량은 그 양(높이)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 말은, 양(높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강도량(위치에너지) 역시 커진다는 의미다. ‘강도’가 바로 ‘차이’라는 것은 다른 예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50℃의 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50℃라는 온도는 그 물의 ‘강도’(세기, 힘)다. 그것은 어디서 왔을까? 100℃의 물과 0℃ 외부 온도의 ‘차이’로 인해서 발생된 것이다. 즉, 50℃라는 ‘강도’는 바로 두 물체의 온도 ‘차이’이다. 이 강도를 통해 돌멩이도 물도 다른 존재로 ‘-되기’가 가능해진다.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져 바닥에 홈을 내는 ‘홈-되기’가 가능하다. 50℃의 물이 식으며 주변의 ‘온도상승-되기’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강도는 현실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게 된다. 

    


우리의 ‘-되기’가 어려운 이유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돌멩이와 물은 비교적 쉽게(자연스럽게) ‘-되기’가 가능한데 우리는 왜 다른 나로 ‘-되기’가 어려운 것일까? 돌멩이는 땅바닥을 자연스럽게 응시한다. 달리 말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의 ‘땅바닥’(단점)을 응시하지 않는다. 외면한다. 낮은 곳을 외면하기에 강도가 발생하지 않고, 그 때문에 ‘-되기’를 할 수 있는 힘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강도는 적어도 우월하고 열등한 두 계열 위에 구축되고각 계열의 배후에는 다시 어떤 다른 계열들이 함축되어 있다그런 한에서 강도는 심지어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고가장 낮은 것을 어떤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여기까지 나아가기 위해심지어 점진적 감소의 상태에서도 어떤 긍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폭포의 역량이나 전락의 역량이 필요하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머리가 나쁜 그 사람은 어떻게 복잡하고 난해한 글을 쓰는 ‘작가-되기’가 가능했을까? 그는 “폭포의 역량”, “전락(아래로 떨어짐)의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는 폭포의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가장 낮은 바닥(콤플렉스)을 응시했다. “그래, 나는 머리가 나쁘지”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을 인정하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강력한 ‘강도’가 발생했다.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기!


학창시절부터 책과 공부만 하던 사람이 쓰는 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글을 쓸 수 있는 강도가 발생했던 것이다. 학창시절, 책과 공부는 뒷전이고 사고만 치고 연애만 하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가장 낮은 바닥을 긍정하자, 강도가 발생했던 것일 테다. 그 강도로 그는 열 몇 권의 책을 내면서 ‘작가-되기’를 했다. 그렇게 다른 ‘나-되기’ 통해 그는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났다. 이제 그는 ‘나쁜 머리’가 콤플렉스가 아니라 자부심이 되었으니까.


 콤플렉스의 극복은 콤플렉스 그 자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자신의 콤플렉스를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가장 낮은 것을 긍정해야지만 차이가 나고, 그 차이가 바로 우리를 다른 ‘나-되기’로 이끌 강도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의 콤플렉스가 낮은 것이면 낮은 것일수록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 높이 차이만큼 강력한 강도가 발생할 테니까 말이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싶다면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의 가장 낮은 곳을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 “나는 키가 작아. 그게 어때서?” “나는 뚱뚱해. 그게 어때서?” “우리 집은 가난해. 그게 어때서?” “나는 엄마가 없어. 그게 어때서?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콤플렉스를 가뿐히 벗어날, ‘-되기’가 가능할 테다. 가장 낮은 곳을 긍정할 때, 차이가 발생하고 그와 동시에 강도가 발생하게 되니까 말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우리에게 당부했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낮은 것 까지 긍정하기!”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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