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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두 사람에게

1.

인생은 살아볼만 한 것이다. 살다보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지인이 자신의 결혼 주례사를 부탁했다. 사회가 아니라 주례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나이 마흔에 주례를 보게 생겼다. 주례를 요청받고 처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걱정이었다. 주례를 볼 나의 걱정이 아니라, 나의 주례사를 들을 사람들의 걱정.

     

 나는 철학이라는 길을 따라 너무 멀리 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진실을 직대면하는 일이다. 그 길을 너무 멀리와서, 평균적인 세상 사람들과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해진지 오래되었다. 삶의 진실은 언제나 아픈 법이고, 세상 사람들은 아픈 것을 언제나 은폐하고 외면하니까. 평균적인 사람들의 대화 중 내가 말하는 순간 분위기를 잘 안다. 갑분싸.      


 남의 결혼식을 망칠 정도로 무례하지 않다. 그래서 물었다. “나의 주례를 감당할 수 있는가?” 괜찮단다. 정말 괜찮을 것인지는 결혼식이 되어 봐야 알겠지만 일단 결혼식 갑분싸에 대한 최소한의 면죄부는 얻었다. 사랑해서 곧 결혼하게 될 이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정리해보는 일만 남았다. 주례에서 해야 할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결혼한 이들에게 보낸다.      



2.

“사랑해서 결혼을 했으니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세요.” 흔한 결혼식의 주례의 단골 멘트다. 이것이 축복인가? 아니다. 저주에 가깝다. 왜 결혼하는가? 사랑해서다. 하지만 결혼은 역설적인 일이다.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바로 그 결혼이 바로 사랑을 점점 옅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을 없애는 일이라는 것. 이는 결혼한 이들은 모두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결혼이 사랑을 없애는 이유는 두 가지다. 사랑했던 두 사람이 조연이 되기 때문이고, 사랑했던 두 사람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의 경험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이라는 의미다. 서로가 주인공이기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하철에서도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기에 사랑은 사랑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랑했던 둘은 순식간에 조연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두 사람은, 장인과 장모의 사위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며느리가 된다. 그렇게 두 주인공은 조연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결혼은 각가지 관계들을 만들어 내며 사랑을 점점 옅어지게 한다.      


 또 결혼이 사랑을 옅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 익숙함이다. 결혼은 일상을 공유하는 일이다.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일상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한 존재가 된다. 익숙함은 사랑의 적이다. 사랑은 설레는 일이다. 설렌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익숙하지 않음을 기쁨으로 느낀다는 의미다. 그래서 일상을 공유하게 되는 결혼은 사랑을 옅게 만들게 된다.


   

 여기까지 듣다보면, ‘그럼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사랑 없는 결혼’이 아닌 ‘사랑이 이어지는 결혼’을 위한 주제 넘는 조언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조언은 결혼하는 두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가족 분들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가족 분들 중, 두 분이 불행한 결혼을 하기를 바라는 분은 한 분도 없을 테다.  그 믿음으로 주제 넘는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두 분이 더 오래 주인공으로 남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나의 사위, 나의 며느리이기를 바라며 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바라는 마음을 가급적 줄이셨으면 좋겠다. 그 요구와 바람은 소중한 두 사람을 조연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내빈 분들은 두 사람이 두 사람으로 함께 하기를 배려해주셨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짜 두 사람을 사랑해주는 방법일 테다.

 


 두 번째 조언은 두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다. 결혼 하면 익숙함은 불가피하다. 그럼 사랑은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냐? 그렇다. 익숙해지면 사랑은 없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서로가 말을 하지 않는 가구가 될 뿐이다. 이것은 절망적 진단인 동시에 희망적 대안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생각은 낯섦’에서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매번 손잡이를 돌리면 열리던 문을 열 때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익숙했던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어!’하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해질수록 사랑이 옅어지는 것이다. 서로를 생각하지 않게 되니까.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항상 같은 사람으로 존재하지 말고 늘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마주침을 긍정하며 매일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면 된다. ‘어, 자기가 시도 있어?’ ‘어, 여보 요즘 클래식도 들어?’ 그때 서로가 낯설어 보인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게 되며 사랑은 이어진다.

      

 아주 드물지만,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한 것이 아니다. 늘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며 평생을 보낸 것이다. 늘 같은 존재로 머물지 않고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기에 매 순간 서로를 생각하며 긴 시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사람도 그렇게 다가올 낯선 마주침들을 긍정하며 매년 조금씩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조금 더, 조금 더 오래 사랑이 이어지는 결혼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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