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1.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가급적 TV토론회는 안 보는 것이 좋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는 이들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으니까. 매년 올해는 안 봐야지 다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년토론회 보게 된다. 올해도, 마조히즘의 정서상태로 토론회를 시청했다. 결과는 ‘역시나’였지만 하나는 건졌다. ‘J’는 볼만 했다. (J의 거의 유일한 무기인) ‘논리’마저 놓고 온 지식인의 토론은 어떤 것인지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볼만했다.
‘한국 언론, 어디에 서있나?’ 토론 주제에 J의 의견은 간명했다. 그는 현재 한국 언론의 문제는 대중의 무지함과 무능력, 그리고 무지함과 무능력을 이용하여 호도하는 대안(비주류) 언론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런 표면적 의견과 달리, J는 토론 내내 ‘대중은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인가?’에 대해 답한 것처럼 보였다. 무지하고 무능력한 대중의 확대재생산 원인에 대해 J는 이렇게 진단한다.
“권위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저도 찬성하고요. 그것에 앞장섰던 사람이 저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권위주의와 더불어서 권위까지 무너졌다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전문가의 말을 믿지를 않아요. 옳든 그르든 아예 믿지를 않는 경향이 너무 심해졌는데.”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비트겐슈타인
2.
‘권위주의’와 ‘권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권위주의는 크고 작은 ‘권력’을 만든다. 즉, ‘권위주의-권위’라는 도식은 ‘권력-권위’을 의미한다. ‘권력’은 힘이다. 이는 비자발적인 힘이다. 즉, 나의 동의 없이 나를 지배할 힘이다. 이는 사라져야 할 힘이고, 이 힘(권력)을 무력하게 하기 위해 권위주의의 해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권위’는 무엇일까? 권위도 힘이다. 권위도 우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그 힘은 자발적이다. 그 지배적인 힘(권위)은 우리가 허락했기에 가능한 힘이다. J의 말은 옳다. 권위마저 무너지는 것은 문제다. 어떤 인간도 모든 것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어떤 이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집과 혼란을 반복할 뿐이다. 모든 ‘권위’(힘)를 부정하는 이는, ‘권력’(힘)에 지배당하는 이보다 불행할지도 모른다.
권위는 자신 밖에서 오지 않는다. 권위는 자신 안에서 온다. 수많은 전문가·지식인들이 있지만 그들 중에 믿고 따를지는 각자가 정한다. 누구에게 권위를 부여할지는 우리 선택이다. 하여, 역설적이게도 ‘권위’는 '지배당하는 힘'이 아니라, '지배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권력’과 ‘권위’를 구분할 수 있는 또 하나 기준점이 마련된다.
권력은 고정적이지만 권위는 유동적이다. 권력은 자리이고 권위는 사람이다. 권력은 그 고정적인 자리 누가 들어가더라도 갖게 되는 힘이다. 하지만 권위는 다르다. 권위에는 자리가 없다. 사람만 있다. 어제까지 누군가에게 주었던 권위를 거둬들여 다른 이에게 부여할 수 있다. 권위는 늘 흐른다. 그것이 ‘권위’의 본질이며, ‘권위’가 지배당하는 힘이 아니라 지배하는 힘인 이유다.
3.
J는 틀렸다. 권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흘러갈 뿐이다. 어제까지 권위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권위는 어디로 흘러갈까?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흘러갈까? 즉, 옳은 이야기를 하는 지식인과 많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권위가 생길까? 아니다. 그렇다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흘러갈까? 즉, 가십거리만을 이야기하는 연예인과 자극적인 주제만 다루는 유튜버에게 권위가 생길까? 이 역시 아니다.
권위는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방식으로 이야기 해주는 이에게 흘러간다. J의 믿음과 달리, 대중은 무지하지도 무능력하지도 않다. 대중은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에게 모인다. 대중은 ‘의미’와 ‘재미’가 모두가 있는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지혜롭고 유능한 존재다. J는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지는 모르나, 듣고 싶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권위를 얻었던 시절은 우연히,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과 맞아떨어진 시절이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해, 누군가와 대화(게임)하고 싶다면 알량한 자기 언어규칙을 버리고 상대의 언어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이다. J는 권위를 잃어버렸다. 그런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지하고 무능하게 대중을 혐오하는 게 아니다. 자신과 대중의 ‘언어게임’의 규칙을 돌아볼 일이다. 능숙하게 ‘언어게임’을 할 수 있을 때 권위는 자연스럽게 흘러온다.
4.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철학을 공부한 J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루비’(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라던데. 철학, 참 우습고 무섭다. ‘앎’과 ‘삶’은 이리도 쉽게 멀어지니 말이다. J가 ‘루비’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