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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내게 하지 말라.

“그냥 편한 이야기하면 안돼요?”


 1년 만에 만난 이에게 들었던 말이다. 한 동안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친구다. 때로 진지하게 때로 유쾌하게 삶의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다. 오랜만에 밥 한 번 먹자고 연락이 왔다. 밥을 먹으며 그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직장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 집값과 이사에 관한 이야기들. 그런 겉도는 이야기들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진짜 삶의 이야기들. 지난 1년 동안의 삶은 어땠는지, 과거의 상처들은 잘 치유되었는지. 


 “우리 함께 했던 시간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아요.” 예전의 따뜻함이 사라진 것 같아 물었다. 거기서부터 그 친구와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더욱 차갑게 답했다. “그냥 편한 이야기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치 않는 진짜 이야기는 폭력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짧은 호흡의 대화와 함께 식사도 끝이 났다. 차 한 잔을 마시러 갔다.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러 나를 만나러 오지 말아요.” 그 친구에게 말했다. 겉도는 이야기는 영혼을 조금씩 휘발시킨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소중한 친구는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그 친구는 당분간 겉도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삶의 진실들로부터 도망 다닐 것 같았다. 아마도 지난 1년 동안 그런 관계를 반복했을 테다. 나는 그 친구에게 비상경보기를 켜주고 싶었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일 수 있는 아픈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내게 자주 털어놓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한다. 그 마음 안다. 그런 진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니까. 진짜 이야기들은 힘들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내가 아팠던 만큼 그 친구는 가벼워질 테니까. 그래서 기쁘다. 힘들지만 기쁘다. 겉도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힘들지 않다. 온 마음으로 들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슬프다. 힘들지 않지만 슬프다. 겉도는 이야기를 하는 이의 영혼이 휘발되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니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게 하지 말라. 그보다 무례한 일도 없다.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무런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나눠도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만남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내면의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만, 또 진짜 이야기는 할 용기가 없어 겉도는 이야기를 하는 만남. 이것이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용기가 없어 사창가를 배회하는 어느 남자의 만남과 무엇이 다를까.   

   

 진정한 만남은 진짜 이야기로 가능하다. 진짜로 웃고, 진짜로 우는 이야기들. 나는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것이 고된 일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렇게 한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나는 그저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 홀로 있을 테다. 결코 사창가를 서성이지 않을 테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만나려고 애를 쓰며 살 테다. 편한지만 슬픈 삶을 멀리하며, 힘들지만 기쁜 삶을 기꺼이 긍정하며 살아갈 테다. 언젠가, 그 친구도 그렇게 기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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