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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너머의 불안

몰입과 사랑은 다르다.

불안은 인생을 좀 먹는다. 불안을 잘 다루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없다. 불안에 휩싸여서 한 번도 불안을 넘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불안을 넘어본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불안을 벗어났을까? 아니다. 다시 불안은 찾아온다. '불안 너머의 불안'이 있다. 어쩌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괴로울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불안만 감당하면 되지만, 후자는 불안에 절망까지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제 불안을 넘어 왔다고 안도하고 있는 순간, 그 찐득한 불안이 다시 스물 스물 덮어 올 때 기분이 어떨까? 불안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 자리구나’라는 절망까지 감당해야 한다. 괴로운 순간이다. 또 위험한 순간이다. 이제껏 겨우 불안을 넘어왔던 삶이 다 무의미한 것 같아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문턱을 배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안 너머의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직장을 다닐 때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출근길에 우울했고, 퇴근해서 불 꺼진 집에 들어올 때면 죽고 싶었다. 그 불안을 철학으로 넘어왔다. 나는 누구인지, 삶은 무엇인지, 세상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불안을 넘어 왔다. 평온한 마음으로 사표를 썼다. 불안은 없었다. 내가 살아가야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불안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원하는 삶을 살던 어느날, 새벽에 눈을 뜨면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느 날은 심장이 두근거려 잠에서 깨기도 했다.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유 없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불안이 다시 찾아왔다. 절망스러웠다. 절망스러워 더욱 불안했다. 나는 여전히 철학을 하고 있는데 왜 다시 불안했던 걸까? 나는 ‘철학’으로 불안을 넘었던 것이 아니었다. ‘몰입’으로 불안을 넘었던 게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을 통해 넘을 수 없다. 특정한 대상의 ‘몰입’을 통해서만 넘을 수 있다.   

   

 그제야 내게 왜 ‘불안 너머의 불안’이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몰입의 중독’ 때문이었다. 철학이 주었던 날카로운 통찰, 통쾌한 반전, 강렬한 지적자극에 중독되었다. 철학을 오래 공부하면서 그 강렬했던 자극이 점차 줄어 들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통찰, 통쾌한 반전, 강렬한 지적자극은 이제 내게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철학이 내 삶이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나는 불안 너머의 불안을 맞이하게 되었다. 낯섦이 익숙함이 될 때, 몰입은 깨지니까.   

  

 불안 너머의 불안. 그것은 몰입에 중독된 결과다. 몰입으로 하나의 불안을 넘었지만, 그 때문에 그 몰입에 중독되어버려서 다시 불안의 늪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다. ‘몰입’과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몰입이지만, 몰입은 사랑이 아니다. 몰입은 무언가를 기대한다. 영어, 취업, 섹스, 영화, 소설에 몰입하는 이유는 무언가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할 뿐이다.


 나는 이제 철학에 ‘몰입’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를 만날 때, 날카로운 통찰도, 통쾌한 반전도, 강렬한 지적자극도 기대하지 않는다. 우연히 그런 것들을 만나게 될 때 잠시 몰입할 뿐이다. 그리곤 다시 나의 철학으로 돌아올 뿐이다. ‘몰입’이라는 자극적인 양념에 현혹되지 않을 때, ‘불안 너머의 불안’을 다시 넘을 수 있다. 그렇게 몇 번의 불안을 넘을 때 알게 된다. 그 감정을 불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불안이 옅어져버렸음을. ‘몰입’ 아니라, ‘사랑’할 때, 불안에 휩싸여 삶이 흔들리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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