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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함의 정당화 도구, 철학

철학의 본령

자신의 미숙함을 까발리는 것, 그것이 철학의 본령이다.


넌 왜 친구들에게 밥을 안 사?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돈이 중요하지 않은 거야.     
넌 왜 부모님을 안 찾아뵙니?
부모를 벗어나야 진정한 어른이 되니까요.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언어가 필요 없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야.     



 철학은 날카로운 칼이다.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당화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래서일까?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명분을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런 이가 철학을 만나게 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철학은 다른 그 어떤 학문보다 가장 강력한 정당화의 명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철학은 알면 알수록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철학을 공부한 A, B, C 세 명의 친구가 있다. A는 친구들에게 밥을 사지 않는다. 나는 A에게 물었다. “너는 왜 친구들에게 밥을 사지 않니?” 그는 진정한 친구 사이에 돈은 중요치 않은 것이라고 답했다. B는 부모님을 보러가지 않는다. 나는 B에게 물었다. “넌 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니” 그는 부모를 벗어나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답했다. C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C에게 물었다. “너는 왜 말을 하지 않니?” 그는 언어가 필요 없는 관계를 원해서라고 답했다.  

   

 이들은 얼마나 인문적인가.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벤야민!)이기에 돈을 벗어난 친구를 만들려는 사람. “부모를 죽여야 비로소 해탈”(임제!)할 수 있기에 부모를 만나지 않으려는 사람.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침묵”(비트겐슈타인!)함으로써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사람. 이들은 철학적이다. 이제, 그들 모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누구 앞에서든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앞에서만은 여전히 주눅 들어 있을 테다. 바로 자신이다. A는 그냥 돈이 아까운 것이다. 관계에서조차 가성비를 따지려는 사람이다. B는 그냥 부모가 두려운 것이다. 두려운 것은 그저 피하고만 싶은 사람이다. C는 그저 상처받기 싫은 사람이다. 세상의 타인들이 두려운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 비루하고 남루한 ‘나’를 철학으로 분칠하려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또 누군가는 무의식적으로.

     

 철학은 그 시작도 그 끝도 정직함이다. 그 정직함이 없다면, 철학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때 철학은, 비루하고 남루한 자신을 정당화할 가장 견고한 성을 지을 토대가 되는 까닭이다. A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라면, 통장 잔고가 바닥날 때까지 아니 알바를 해서라도 친구들에게 밥을 사줘야 한다. B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라면, 부모를 찾아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C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라면, 오해받을 각오로 타인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떠들어야 한다. 진정한 철학은 그런 것이다.

      

 철학은 분칠이 아니다. 자신의 미숙함을 정당화하는 분칠. 철학은 칼이다. 자신의 미숙함을 까발리는 날카운 칼. 그 날카로운 칼로 해야 할 일은, 겹겹이 쌓인 자신의 페르소나를 도려내는 일이다. 나는 그것이 철학의 본령이라고 믿고 있다. 철학의 본령을 지금 다시금 상기하는 것은, A, B, C를 위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혹시나 내가 모르는 분칠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철학을 사랑하는 나는, 항상 철학의 본령에서 아프게 서 있고 싶다. A도, B도, C도 분칠은 그만하고 철학의 본령에서 철학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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