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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작은 깨달음

‘전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게 새로운 '아빠'와 '엄마'가 되어주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너는 정말 부모를 죽였는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내주었던 과제다. 나와 함께 공부하면서 그는 성숙했다.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 ‘자라옴’을 긍정하며 다시 자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자라옴’을 긍정하지 못해,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라면 어른이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자라옴’은 어른에 가닿지 못한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부모를 죽여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대체로 부모를 죽이지 않을 만큼의 어른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늘 정서적 불안정에 휩싸여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서적 불안정(불안, 의존, 소외 등등)은 부모를 죽여 진정한 어른이 채 되지 못해 어른인 체 해야 하는 이들의 숙명이다. 제자 역시 그랬을 테다. 무럭무럭 자라오다, 부모의 그늘에 발목 잡혀 버린 거였을 테다. 그래서 과제를 내었던 게다. 그는 그 과제에 대략 이리 답했다.

     

 나는 부모인 그 ‘사람’은 내 마음 속에서 죽였지만, 부모라는 ‘형식’은 죽이지 못했다. 내게는 다른 부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새로운 부모를 믿고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다. 

     

 얼핏 보면, 제자는 제자리걸음을 한 것 같다. 아니 퇴보한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이 되려면 부모를 죽여야 하는데, 부모를 죽이기는커녕, 또 다른 부모가 생겼다니 말이다. 하지만 제자의 답은 근사한 답이다. 제자는 삶 그 자체로 진정한 앎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 不立文字! 언어(앎) 없이 삶 그 자체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가.


      

 인도 유식학파의 창시자인 ‘바수반두’라는 불교 사상가가 있다. 그에 따르면, 깨달음(해탈)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해체에서 온다. 쉽게 말해, ‘나’와 ‘너’를 구분하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 부모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나’(주체)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너’(대상)가 바로 부모이기 때문 아닌가. 깨달음(해탈)이 행복이라면,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와의 관계를 해체하는 일일 테다.

           

 이제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깨달음에 이르면, 달리 말해, 내 마음에서 부모를 죽이면,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바수반두에 따르면, ‘바탕의 변화’가 생긴다고 말한다. ‘바탕의 변화’는 산스크리트어로 ‘Asraya-paravrtti’의 번역어인데, 한자로는 ‘전의轉依’라고 번역된다. ‘전의’가 무엇인가? ‘의지하는 것依 바꾼다轉’라는 의미다. 바수반두의 통찰은 놀랍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깨달음(해탈)의 상태가 되면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게 되는 상태라 여긴다.

      

 하지만 바수반두에 따르면, 깨달음은 의지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부모를 죽인다’라는 것은 부모를 내 마음에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모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깨달음, 즉 진정한 행복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제자가, ‘나는 새로운 부모를 믿고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패배감이나 슬픔은 전혀 없고, 오히려 유쾌함과 기쁨이 가득했던 이유도 그래서 일 테다. 제자는 스스로 작은 깨달음에 도착했으니까.


 행복해지고 싶다면, 허황된 주체성부터 버려야 한다.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주체적인 인간이 될 거야!’ 이런 허황된 주체성은 우리를 깨달음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진정한 주체성은 다시 새로운 부모를 맞이할 강건함이다. ‘바탕의 변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허황된 주체성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나서는 것뿐이다. 삶은 참 역설적이다. 누구보다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던 제자가 그리도 집착했던 주체성을 버렸을 때, 진정으로 주체적인(깨달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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