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이 욕망으로 건강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 주인공이 될 때 스스로 주인된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욕망이 과도해지면 문제가 된다. 소위 ‘관종’이 그런 부류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과할 때 아무데서나 나대는 ‘관종’이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이 과도할 때 ‘관종’이 아니라 ‘주변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 곳에서도 결코 나대지 않는 ‘주변인’
정말이다. 늘 듣기만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주변인’이 있다. 그들은 늘 나대는 ‘관종’과 다르지 않다. 둘 모두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이 과도한 이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상처받은 경험이다. 주인공이 되려다 상처 받은 경험이 적은 사람은 ‘관종’이 되고, 상처 받은 경험이 많은 사람은 ‘주변인’이 된다. ‘관종’이었다 어느 순간 ‘주변인’이 된 이들은 흔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2.
‘주변인’인 이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 말이 없다.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그 사실 조차 말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걸 말하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용기 없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몇 번의 상처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고 있는 유약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주변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주변인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다. '주변인'은 그 믿음으로 세상에 나가 주인공이 되려는 시도들을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일로 치부할 합리적 근거를 마련한다. '주변인'은 공부도, 운동도, 심지어 사랑마저도 혼자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더 커져 나머지 욕망마저 뒤틀리게 만든다. 욕망이 뒤틀린 혼자인 삶. 그런 삶이 어찌 슬픔으로 가득하지 않겠는가.
그는 종종 사람을, 세상을 다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는 ‘주변인’으로 ‘주인공’이 되려는 허황된 제스처다. 그것은 비겁한 자기기만이다. ‘주인공’이 되는 거친 시도들을 건너 뛴 채, 골방에 갇힌 ‘주변인’으로 ‘주인공’이 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주변인’인 그가 ‘관종’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변인’보다 ‘관종’이 낫다. 적어도 ‘관종’은 주인공이 되기를 두려워 뒷걸음질 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가 상처가 많아도 어쩔 수 없다. 삶은 원래 야박한 것이니까.
그는 알고 있을까? ‘관종’일지라도 웃으며 그를 사랑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사랑할 준비가 된 이들을 정말 지치게 하는 사람은 ‘관종’이 아니라 ‘주변인’이라는 사실을. 그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사랑도 사람도. 그에게 바란다. 더 이상 주변인에 머물지 말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가 주인공이 될 준비를 하기를.